05. 대충 써도 섬세하게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요즘은 쓰는 시간보다 퇴고하는 시간이 길다.

평소보다 글이 술술 써진다 싶어도 좋아하는 내색은 하지 않는다. 결국 퇴고에 막혀 허우적 될 운명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퇴고가 글쓰기에 있어 중요하다. 공들여 쓴 글이라 하더라도 조금만 깨작거리며 수정하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새로 쓰겠다는 각오로 임해도 될까 말까니까.


이런저런 시도 중에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쓰기 + 퇴고 = 완성'이라는 공식에서 완성이라는 값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거 같다고. 글쓰기에도 총량 일정의 법칙이란 게 존재하는 듯했다. 그래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퇴고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글은 좋은 쪽으로 우상향 한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전보다 읽기 편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퇴고의 표면적인 과업은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용은 그다음이다. 글이 읽히지 않는데 심오한 내용이 있어본들 누가 읽을 수 있겠는가.


나는 퇴고를 입으로 하는 편이다. 일단 쓰고 나면 입으로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는다. 읽기만 해도 흐름이 막히는 곳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묵독하면 잘 보이지 않던 어색함이 음독하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글쓰기 책 중에 열이면 아홉이 퇴고 시 음독을 추천하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글이라는 것은 눈으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눈으로 보고 말로 내뱉고 자신의 귀로 듣는 것만 못하다. 모르긴 몰라도 감각을 많이 동원할수록 생각의 촉수를 더 많이 뻗칠 수 있나 보다. 음식도 코를 막고 먹으면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글을 읽다가 막히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단어 선택이 적절치 않아 그럴 수도 있고 문장이 길어서 그럴 수도 있다. 특정 음절이 글이 가진 운율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단어 선택이 어색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에 사전 검색 후 그 이상한 단어를 검색하면 된다. 그러면 유사한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넣으면 된다. 아니면 표시를 해 놓았다가 다음에 수정한다는 생각으로 넘어가면 된다. 샤워를 하거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보면 답이 나올 때가 많다. 그 자리에 적합한 단어는 한 개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찾아보자. 강원국 작가의 '대통령의 글쓰기' 책에 보면 이 같은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속는 셈 치고 따라 하다 보면 막혔던 글이 술술 풀리곤 한다.


문장이 긴 경우는 조금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문장이 길면 숨을 쉴 타이밍을 잡기 어려울뿐더러 앞서 읽었던 단어가 잊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나처럼 단기 암기력이 나쁜 사람이 독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글을 길게 써야지만 글을 잘 쓰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긴 문장이 자신의 지식을 옹호한다거나 글 잘 쓰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애매함 뒤에 숨어 언제든 빠져나갈 퇴로를 확보하려는 의도로 보일뿐이다. 한 문장에 한 가지의 뜻을 담는 것이 가장 좋다.


문장을 나누면서 접속부사를 남발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그러나, 왜냐하면, 하지만' 이런 접속부사가 많으면 독자에 의한 자발적인 생각보다 글쓴이의 감정을 설명하려 든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설명이 많은 글은 지루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다. 설명보다는 보여주는 글을 쓰자. 작가의 의도대로가 아닌 작가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알아서 따라간다. 독자는 충분히 똑똑하기에 때로는 작가의 생각을 앞서기도 한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자. 그렇다고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만 쓰면 어떨까? 작가의 필력이 좋다면 간결한 글이 탄생할 수도 있겠지만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문장이 계속해서 끊어지면 건조하고 삭막한 글이 될 수 있다. 단문 3개 복문 1개 이런 식으로 강약을 조절하며 쓰는 편이 몰입도를 높이는 방법인 듯하다.


단문을 쓰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처음부터 단문을 의식하며 쓰지 말자. 머릿속에 한 문장에 한 가지 뜻만 되뇌다 보면 잘 쓸 수 있는 글도 못쓰게 된다. 모든 생각이 단문이라는 체망에 걸려 나오질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퇴고할 때 요약하며 정리하면 된다. 나는 이렇게 쓰는 방법이 가장 편했다. 물론 지금도 잘 쓰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노래에 리듬이 있다면 글에도 억양이 있고 운율이 있다. 시는 이런 리듬감이 극대화되어 있는 대표적인 글이다. 뜨문뜨문 나오는 단어를 디딤돌 삼아 껑충껑충 읽다 보면 한 껏 농축된 의미가 입안을 가득 메운다. 특정 지을 수 없는 은율과 박자에 눈과 귀가 모두 즐겁다. 이런 글을 읽고 있노라면 노래를 부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산문이라고 이런 리듬과 호흡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시보다는 덜하겠지만 분명 글 특유의 운율이 존재한다. 작가가 수십 번 읽으며 다듬었을 법한 글에서 그의 숨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이런 호흡이 작가마다 고유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에 있는 지문처럼 작가를 따라다니며 글 여기저기에 묻어 있다. 나는 이런 결을 느낄 수 있는 글이 좋다. 작가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방역차를 따라가는 기분으로 따라가게 되더라.


내가 퇴고를 가장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호흡 때문이다. 명확하게 어떤 방법으로 퇴고하면 되는지 모른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글에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와 근거를 넣을지 고민했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나 다운 숨소리를 글에 불어넣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이 조금 바뀌었다. 지독하게 깔끔한 논리로 범벅된 글보다 사람 사는 숨소리가 들리는 글이 더 읽기 편했다. 글을 다 읽어도 따스한 여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런 글이 쓰고 싶었다. 많은 글을 읽으며 연구해 봤지만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난감했다. 글 쓰는 방법도 바꿔보고 쓸 때의 그 느낌도 다르게 했지만 쉽게 발현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조금이나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특정 작가의 글을 많이 읽다 보면 그의 언어 습관이 내 글에도 조금씩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방법을 알아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그 작가의 글이 좋아서 한 행동이었다. 계속해서 읽었더니 그 작가와 비슷한 호흡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으면 어김없이 그 작가의 숨결이 나타났다. 특정 지을 수 없는 모방과 습득의 단계가 그저 신기했다. 그때부터 내가 닮고 싶은 작가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어떤 책은 36번까지 읽고 그만둔 책도 있다. 그렇게 실컷 읽고 나면 내 글에서 배설하기 시작했다. 내 글을 읽으며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면 어떻게 썼을지 짐작했다. 나는 그렇게 퇴고했다. 읽으면서 그 느낌을 쫓았고 비슷하게 숨 쉬려 노력했다.


지금까지 내가 퇴고하는 방법을 나열해 봤다. 글을 쓸 때는 지금과 같은 방법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쓴다. 퇴고를 미리 생각한 작문은 생각의 흐름을 막을 뿐이다. 그저 의식의 분주함에 맡겨둔다. 쓴다기보다는 단어의 나열 정도? 시간도 장소도 순서도 존재하지 않는 혼돈에서 퇴고를 시작한다. 말이 되는 방법으로 자르고 쪼개고 지우면서 읽고 또 읽는다. 꼭 퍼즐 조각 맞추는 기분 같다.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부터 나열 후 그다음에 보이는 내면을 맞추는 재미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나는 작문보다 퇴고를 더 좋아한다. 창작이란 말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쓰기에 대한 마음가지만 나열했다면, 오늘은 왠지 방법도 적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남긴다. 누군가에게 이 글이 가닿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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