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 스폰하는 거 도와줄 수 있지?”
“응? 또 결혼하는 거예요?”
“부모님이 자꾸 재촉하셔서... 올해 안에 하기로 했어.”
오래간만에 찾아온 George의 소식은 뜻밖이었다. 힘들게 배우자 스폰을 한 지 1년도 안 돼 이혼한다고 했을 때도 놀랐지만 또 결혼을 한다니. 그것도 지난번처럼 인도에서 캐나다로 부인을 데려오겠다고 한다. 배우자 스폰이란 George처럼 캐나다에 사는 시민권자가 외국인과 결혼을 해 영주권을 스폰서 해주는 걸 의미한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나의 업무 중 하나는 이런 배우자 스폰을 할 때 필요한 서류를 검토를 해주는 일이다. George와도 기관에서 클라이언트로 만나 친해지게 됐다.
가까워지다 보니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인도 출신인 그가 카스트라는 신분제도에서 왕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분명 같은 왕족과 결혼하려 할 거다. 신분제도를 떠나서라도 좋은 가족 아래에서 행복하게 자란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배우자를 만나려는 건 자연스러운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George의 첫 번째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다. 부인은 인도로 도망치듯 떠났다. 부유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왕자님과 공주님이 만나 한 결혼인데 왜 그렇게 끝났을까? 궁금하지만 꼬치꼬치 물을 순 없다. 결혼이란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건가 짐작할 뿐이다.
그의 실패를 보면 괜스레 자신감이 떨어진다. 부자는커녕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데다가 부모님까지 이혼하셨으니 어떻게 보면 나는 흠이 많은 사람이다. 이런 나도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무수한 스폰 서류를 검토하다 보면 George 같은 클라이언트뿐만 아니라 나 같은 사람도 종종 눈에 띈다. 그들은 스스로의 흠을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과는 다르게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과 결혼하려 한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런 커플 중에서도 헤어지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좋은 가족 아래 태어난 사람이 과연 최고의 배우자감일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사랑 많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좋은 사람과 좋은 배우자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의 한없는 사랑을 받아 자연스레 좋은 사람으로 자라난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가정을 꾸려 나갈 때 역시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겨를이 없지 않을까 싶다. 반면,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가정이란 아차 하면 부서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을 터. 그리하여 가족을 만드는 데 있어 그지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일 것이라 나는 믿는다.
이런 생각에 확신이 든 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배우자에게 헌신하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우리 캐나다 아부지의 둘째 사위 Ervin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Ervin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본인 또한 술과 약에 중독된 끝에 마약을 유통하는 갱 멤버가 되었다. 결국 총격 사건에 휘말려 교도소에 갔지만 그곳에서 상담사로 일하는 캐나다 아부지의 딸, Kirtstein을 만나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Kirstein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출소 후에는 대학교에 입학해 자신의 꿈이었던 영화를 공부했고 개성 넘치는 작품도 만들어 냈다. 그의 성실함이 결실을 맺어 현재는 캐나다에서 주목받는 인디 영화 감독이 됐다. Ervin의 개인적인 성공도 놀랍지만 사랑하는 Kierstein을 위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더욱 놀랍다. 직장에 다니는 아내를 위해 사랑의 도시락을 매일매일 싸주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왕복 두 시간을 운전해 출퇴근시켜주는 걸로도 모자라 근사한 저녁상까지 차려낸다. 이 정도면 현모양처의 남자 버전 아닌가?
심지어 “추수감사절에는 당연히 칠면조지!" 귀여운 허세를 부리며 처가 식구를 초대해 직접 요리한 칠면조를 대접하기까지 한다. 손이 많이 가는 명절 음식을 간소화하는 집이 늘어가는 것처럼, 캐나다에서도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굽지 않는 집이 많은데도 말이다. Ervin이 커다란 포크와 나이프로 칠면조의 배를 갈랐다. 육즙이 푹 배어든 사과, 레몬, 타임, 감자 등 갖가지 채소와 허브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간만에 보는 푸짐한 광경에 모두가 감탄하며 서둘러 포크를 들었다. 한 입 베어 무는데 스읍, 후아! 향기로운 내음이 입안을 채웠다.
모두들 음식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는데 Ervin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았다. Ervin을 힐끗힐끗 훔쳐보다 눈이 마주쳤다. 내가 씽긋 웃자 Ervin도 따라 웃었다. Ervin은 알까? 내가 웃은 이유는 낑낑거리며 칠면조 똥꼬에 각종 과일과 야채를 쑤셔 넣는 Ervin의 모습이 떠올라서라는걸. 그래, 최고의 배우자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지. 그동안 나름대로 힘겹게 살아온 덕에 낑낑거리며 노력하는 거라면 나도 자신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매일 저녁 밥상을 차리는 건 기본이요, 명절에는 처가댁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전을 부칠 테다. 왠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