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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ㅐ즈애플 Oct 05. 2022

비비안의 변성기



    오늘은 사랑하는 비비안의 생일이다. 비비안은 나를 가족처럼 여겨주는 르베카 아줌마네 첫째 아이다. K-pop을 좋아하고 태권도를 배우는 한국 덕후 비비안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보였다. 열한 살인 비비안의 아래로 일곱 살, 다섯 살짜리 동생들도 있기는 하지만 워낙 꼬맹이인지라 비비안과 가장 가깝게 지내게 된다. 보라색을 좋아하니 오늘도 분명 보라색 옷을 입었겠지. 옷 색깔과 잘 어울리는 하얀색 장미 열한 송이를 샀다. 부드럽고 달콤한 걸 좋아하는 입맛에 맞춰 아이스크림 케이크도 빼먹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동생들이 우당탕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비비안이 나타났다. “생일 축하해!” 장미꽃을 건네자 수줍게 웃으며 “고마워” 하고 말하는데, 목소리를 듣자 하니 어느새 변성기가 왔나 싶다. 그러고 보니 목젖도 조금 올라온 것 같다. 사실, 비비안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이다.


    생일 열흘 전 르베카 아줌마에게서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올해 생일부터는 에반을 비비안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그동안 말하진 못했지만 비비안은 자기 안에 여자가 있다면서 여자가 되고 싶다고 해왔거든. 같이 기도해 보자고도 했지만 이제는 여자로 인정해 주려고 해. 비비안을 지칭할 때도 She/her로 하기로 했어. 루이스도 우리 비비안을 지지해 줬으면 해.’


당황스러운 마음에 읽고 또 읽다 보니 행간에 숨어 있는 르베카 아줌마의 조심스러움과 그동안의 속앓이가 보이는 듯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느라 답장을 안 한다고 생각하실까 싶은 마음에 바로 메시지를 써 내려갔다. 


‘와우! 이번 생일은 비비안에게 정말 특별하겠네요. 이렇게 중요한 날에 가족으로서 함께 한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케이크랑 꽃은 내가 준비할게요. 벌써부터 생일날이 엄청 기대되네요. 모두들 빨리 보고 싶어요!’


     답장을 하고 나니 르베카 아줌마와 교회 다과 시간에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났다. 캐나다 교회는 예배가 끝나고 다 같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근황을 나눈다. 하지만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과 말하기 부담스러웠던 나는 아무도 말을 못 걸도록 쿠키와 커피를 입에 잔뜩 집어넣고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한 아줌마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 입안에 가득한 쿠키를 겨우 삼키며 한국에서 왔다고 더듬더듬 말하자 아줌마가 반색하며 말했다.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이다. 내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아줌마가 빙그레 웃으셨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아줌마의 직업은 언어 발달이 늦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가까이에서 봐 오셔서 그런지 교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 후로 아줌마는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닭 공장에서 일할 때,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헤어져 흑흑 울 때, 뒤늦게 시작한 대학 공부 때문에 쩔쩔맬 때. 아줌마는 언제나 내 편에 서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외국인인 내가 캐나다에서 이방인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던 건 아줌마의 무한한 사랑 덕분이다. 평생 갚아도 모자란 사랑을 받다 보니 내리사랑이란 말이 왜 생겨났는지 알 것만 같다. 아줌마에게 미처 갚지 못할 사랑을 비비안에게 주고 싶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캐나다에 녹아들었듯 비비안 역시 자신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곁에 있어 주리라.


    아줌마의 부름에 이끌려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로 향했다. 립과 치킨, 바닷가재 등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비안이 여자로서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라 다들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는 눈치다. 이럴 땐 내가 나서야지! 분위기도 띄울 겸 치킨을 가리키며 닭 공장에서의 에피소드를 꺼내놓았다. “닭털을 잘 빠지게 하려면 따뜻한 물에 닭을 담가야 하거든? 한번은 내가 닭이 가득 담긴 욕조에 들어갔는데 있지, 물이 너무 뜨끈해서 오줌이 막 나오려는 거야!” 동생들이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깔깔 웃었다. 아줌마도 긴장이 풀렸는지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는 나를 보며 한마디 거드셨다. “루이스는 누가 말 못 걸게 꼭 입에다 잔뜩 넣고 먹더라?” 이번에는 비비안도 함께 웃었다. 찰칵, 아저씨가 때마침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잠시 후, 인화지의 어둠이 서서히 가시며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늘을 기념하려 펜을 들어 한 마디 적었다. ‘열한 살 비비안의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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