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요일이란 짜파게티 요리하는 날이다. 하지만 외국에 사는 나에게는 캐나다 부모님 댁에서 어무니가 해주는 오믈렛을 먹는 날이다. 내가 만든 음식도 맛있기는 하지만 어무니의 손맛이 담긴 요리를 넘어설 순 없다. 게다가 부드러운 버터와 고소한 베이컨이 잔뜩 들어간 오믈렛이라니! 현관문 근처만 가도 그 냄새가 진동해 식욕을 자극한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싸늘하다. 어무니가 아침에 계단을 오르다 넘어져 무릎을 다치셨다고 한다. 어무니의 퉁퉁 부은 무릎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보아하니 어무니는 병원에 가고 싶은 눈치인데 아버지는 내켜 하지 않으신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부지한테 당장 병원에 가자고 하니 뜨뜻미지근해 하신다. 나 혼자 업고서라도 가겠다고 생떼를 쓰니 그제야 주섬주섬 겉옷을 챙기신다.
병원에 도착해보니 아버지가 그렇게 오길 꺼리셨던 이유를 알겠다. 많은 사람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캐나다 병원에서는 피가 철철 나는 게 아니면 종일 기다려야 의사를 겨우 만나볼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곧이어 아부지의 딸들도 도착했다. 이미 경험이 많은지 잡지도 한 뭉텅이씩 갖고 왔다. 다들 반나절은 기다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온 모양이다. “커피 마실 사람 손!” 자식들이 괜히 고생하는 거 같아 미안하셨는지 아부지가 외치셨다. 그래도 모처럼 다 같이 모이니 반가웠다. 아부지가 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근황 토크를 한참 나눴다. 그럼에도 우리 차례는 오지 않았다. 이번엔 각자가 최근 읽은 책, 재미있게 본 영화 얘기를 했다. 하지만 우리 차례는 아직 먼 모양이었다. 내가 쓰고 있는 정신질환자의 안락사 가능 여부 리서치 페이퍼 주제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했지만 우리 차례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더는 남아있지 않았을 때쯤, 모두들 자연스레 잡지를 펼쳤다. 나 역시 잡지를 집어 들다가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미래의 내 아내가 아프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나는 아내가 아프다는 말의 “아" 자만 뻥긋해도 당장 업고 병원에 달려갈 거다. 최근 인스타에서 우연히 본 글 때문이다. 글쓴이는 여덟 살배기 여자아이의 아빠다. 어느 날, 공주가 되고 싶다는 딸아이의 말에 아빠는 이렇게 대답한다. “넌 이미 공주야. 나의 사랑스러운 공주!” 그런데 딸이 진지하게 자신은 진짜 공주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던 아빠는 변호사를 찾아간다. 그리고는 나라를 세울 방법이 있는지 자문한다. 변호사는 어느 나라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땅을 찾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아빠는 그런 땅을 기어코 찾아낸다. 그곳은 이집트와 수단 사이에 있는 사막이었다. 그는 그곳에 직접 찾아가 북수단 왕국을 세워 왕이 되었고 딸은 소원대로 공주가 됐다. 딸은 공주로서 첫 번째 소원을 말한다. "가난하고 배고픈 아프리카 친구들을 돕고 싶어요." 아빠는 사막에 친환경 농장을 만들 과학자를 모집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부금 모금도 한다. 북수단 왕국에 기부하면 명예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고 그것이 아무리 황당하더라도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것. 주위를 보면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가장 아껴줘야 할 연인에게 남보다도 못하게 대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는 직장 상사나 친구는 극진히 대접하면서 배우자는 푸대접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부모나 형제자매는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져 있어 선택할 순 없다. 하지만 남남에서 출발해 가족으로서 평생 함께할 거라면 이야기 속 주인공 아빠와 같은 사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추운 캐나다에서 나와 결혼해줄 사람은 얼음 나라 공주님으로 만들어 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는데 간호사가 드디어 우리에게 다가왔다. “보호자 한 분만 환자랑 엑스레이실로 가주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캐나다 아부지가 벌떡 일어서시더니만 어무니를 부축해 엑스레이실로 향한다. 그런 아부지의 모습이 제법 호위 무사처럼 보였다. 이제 보니 어무니도 아부지에게는 얼음 나라 여왕님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