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재하다. 하지만 지금껏 여러 개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어렸을 때 듣던 동요 속 주인공, 곱슬머리 내 동생의 별명이 서너 개인 것처럼 말이다.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던 20대 시절, 여행지의 언어로 된 이름을 사용했다. 인도에서는 빛나는 돌이라는 뜻인 노르부, 일본에서는 바다라는 뜻의 우미, 프랑스에서는 똑똑한 학생의 이름을 딴 다미앙, 모로코에서는 창세기 주인공 중 한 명의 이름인 유세프. 누가 보면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빚쟁이인 줄 알겠다. 맹세컨대 신분 위장을 위해 각기 다른 이름을 쓴 건 아니다. 한국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어하는 현지 사람을 위한 배려였고, 덕분에 그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릴 때면 그곳에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자유로운 느낌도 덤으로 얻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결국 여행자 생활을 정리하고 이민자가 되어 캐나다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난, 루이스가 되었다. 신나게 여행을 다니느라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대학교에도 뒤늦게 입학했다. 여행하며 방황했던 시간을 정리하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전공도 철학으로 정했다. 처음에는 나의 선택이 옳은 줄 알았다. 한평생 철학만 공부해 온 교수님들께 영어와 삶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후회 중이다. 안 하던 공부를, 그것도 이 나이 먹고, 게다가 영어로 하려니 너무 힘이 든다. 한글로도 쓰기 어려운 에세이를 영어로 써서 매주 제출해야 하다 보니 한 주 한 주가 고비다. 자유롭게 여행하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재밌는 건 대학교에 다니며 나는 다시 재하가 됐다. 학교에서는 여권 이름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국 이름을 쓰니 오히려 어색했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간혹 ‘지하’라고 엉뚱하게 발음하는 교수님도 계신다. 하지만 대부분은 힘겨움을 무릅쓰며 재하라고 신경 써서 발음해 주신다. 그런데 요즘 듣는 철학 수업 교수님은 나를 ‘예하’라고 부르신다. 캐나다 사람이지만 10년 동안 스웨덴에서 유학을 해서 J를 Y로 발음하는 스웨덴어의 영향을 받으신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토론 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각자의 의견을 묻고 대꾸하다 보니 서로의 이름을 자꾸만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내 발표가 끝나자 교수님께서 질문이 있다고 하시더니만, 내 이름이 예하인지 재하인지 물으셨다. 모두가 나를 재하라고 하는 걸 들으시고는 그동안 당신께서만 예하라고 불러왔다는 사실이 머쓱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한국식으로는 재하가 맞지만 스웨덴식으로 예하라고 불리니 유명 철학자 이름 같아 좋다고 말이다. 가뜩이나 따라가기 힘든 수업, 철학자 기분이라도 나게끔 계속해서 예하로 불러달라고 덧붙이니 강의실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교수님의 실수를 유머로 승화시켜서였을까. 그 뒤로는 예하라고 편하게 부르신다. 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예하로 부르기 시작했다. 김춘수 시의 ‘꽃’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교수님이 나를 예하라고 불러 주시는 순간, 똑똑하고 냉철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전히 에세이 쓰기는 버겁고 영어로 하는 토론이 있는 날에는 수업에 가기조차 싫다. 그러나 예하가 되어 수업을 듣다 보면, 자유로운 동시에 혼란스럽기도 했던 지난 시절의 격정적인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이제는 그동안의 방황을 정리하고 이곳에서 내 삶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