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아빠가 두 명 있다. 첫 번째 아빠는 한국에서 낳아준 아버지, 두 번째 아빠는 캐나다에 온 이래로 나를 쭉 보살펴준 아버지. 두 번째 아빠를 나는 ‘캐나다 아부지’라고 부른다. 외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캐나다로 왔다. 하지만 처음 왔을 당시 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할렘가에 살기 시작했다. 할렘가에 사는 대부분 사람들은 나처럼 돈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는 외국인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소외받기 마련이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힘겹게 살아가던 어느 날, 동네 교회의 문 앞에 크게 나붙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무료 영어 교육…?’ 정말 무료가 맞는지 확인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은 웃으면서 무료가 맞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담당 선생님이 현재는 휴가 중이라 다른 자원봉사자한테 연락을 해봐야 한다며 전화를 돌렸다. 그렇게 해서 연결된 사람이 지금의 캐나다 아부지다.
처음 만난 날, 아부지는 지역 신문을 갖고 오셨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 영어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지역 신문은 정말 훌륭한 영어 교재였다. 영어 공부를 위해 읽기 시작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다양한 문제를 알게 해줬다. 캐나다의 문화 또한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영어로 할 얘기가 늘 많았다. 아버지는 신문 내용에 따라 수업 장소를 매번 바꾸셨다. 정치 관련 기사가 나오면 우리는 국회로 가 실제 기사에 나왔던 내용이 배경이 되는 곳에서 수업했다. 미술 전시 기사가 나오면 미술관에 가 신문에 나왔던 그림을 직접 보며 감상을 얘기했다. 공구에 관한 광고가 나오면 대형 공구 상점에 갔다. 그곳에서 아부지는 공구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천천히 하나하나 설명해주셨다. 학교 과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졸업 후 회사 면접 준비를 하며 좌절할 때도, 그리고 면접장까지도 함께 했던 건 캐나다 아부지였다. 아부지가 감독이면 나는 선수고 친구라면 우리는 베스트 프렌드였다. 친아버지와 친아들 이상의 관계가 우리에게 생겼다.
취직이 결정됐을 때 직장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차가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 통장에 돈이 다 떨어져 차 살 여유가 없었다. 발만 동동 구르다 입사를 결국 포기하려 할 때 나를 도와준 것도 캐나다 아부지였다. 아부지는 카드를 몰래 빌려주며 친자식들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나를 믿고 큰돈을 빌려준 아부지가 고마워 평일에는 회사에서, 주말에는 카페에서 주 칠 일 모두 일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매월 백만 원씩 갚아 드렸다. 아부지는 돈을 받으실 때마다 굉장히 미안해하셨다. 걱정 어린 목소리로 생활비 할 건 있냐며 조금씩 갚으라고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날 무렵에서야 빌린 돈을 거의 다 갚을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돈을 봉투에 담아 드린 날, 아부지는 나를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 주셨다. “와우~ 이젠 빚이 하나도 없네!" 아부지는 오늘을 기념하자며 무척 신나하셨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캐나다 아부지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지금 나는 공공기관에서 이민자와 난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 캐나다 왔을 때의 막막함과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이 너무 뿌듯하다. 항상 도움만 받던 내가 이제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부지의 한결같은 사랑과 열렬한 응원 덕택이다. 할렘가에 살며 중고차 살 돈도 없던 나였지만 이제는 아부지 비행기 태워줄 정도로 돈도 많이 벌었다. 크리스마스와 생신 때마다 아부지가 좋아하는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도 선물 할 수 있다. 미안해하면서도 좋아하는 아부지를 보면 행복하다. 아부지랑 스코틀랜드로 위스키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예전에 아부지는 영어를 가르쳐 주실 때 국회, 미술관, 공구 마트로 나를 데려가 주셨듯, 이번엔 내가 아부지를 모시고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로 가야겠다. 그곳에서 직접 마시고 느끼는 효도 관광을 시켜 드리고 싶다. 한국의 효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