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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Aug 21. 2021

결핍과 욕망 사이 (2)

패션, 그 무언가를 채워주는 것

현대사회에서 패션은 생필품의 의미를 넘어선다.

옷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꼭 필요한 만큼 이상의 옷을 갖고 싶어 한다. 옷장에 한 가득 옷이 차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옷에 마음을 빼앗겨 또 지갑을 연다. 새로운 옷의 실루엣, 소재, 색상 또는 디테일. 알 수 없는 그 무엇은 인간이 갈구하는 어떤 지점을 자극하고, 인간은 소유하고자 욕망한다.


패션은 '새로움'을 요구받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의 주기를 갖는다. 새로운 옷은 이전의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채택된 옷은 더 이상 새롭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다시 외면당한다. 물론 이러한 패션의 주기와 무관하게 꾸준히 사랑받는 스타일의 옷도 있다. 가령 예를 들면 트렌치코트나 피코트 같은 것들인데, 이와 같이 트렌드를 벗어나 지속적으로 채택되는 아이템을 '클래식(classic)'이라고 한다.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패션이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그 새로움이란 인간의 갈구하는 어떤 지점을 자극하는 것, 즉 내면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결핍을 채워주는 새로운 패션 스타일이 시대적 공감을 이끌어낼 때 큰 유행 현상을 만들어낸다.

패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게 유행이 변했던 사례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이다.




창의성은 결핍에서 온다

스커트 길이가 짧아질수록 양말 산업이 흥한다. 당연한 이치이다.

스커트가 점점 짧아져 다리를 드러내게 된 1920년대 이래로, 여성들은 다리를 더욱 매끈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스타킹을 애용해 왔다. 그러나 얇고 부드럽게 다리를 감싸는 실크 소재의 스타킹은 가격이 매우 비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크 대용 소재인 레이온이 등장했으나 과도한 빛 반사가 '인조'임을 드러내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레이온은 인조실크, 즉 인견이라 부른다) 이후 듀폰사가 개발한 나일론은 가격, 탄력, 촉감 등 모든 측면에서 만족스러운 소재였다. (나일론은 인류 최초의 완전한 합성섬유라 불린다)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최초의 나일론 스타킹이 세상에 등장하고 곧 대중은 열광했다. 거미줄보다 가는 나일론 원사는 마찰에 강하고 신축성이 높아 다리를 더욱 탄탄하고 매끈하게 감쌌으며, 저렴하고 오래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일론은 스타킹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얼마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모든 나일론 공장은 패션 아이템이 아닌 낙하산과 로프 등의 군수용품을 생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핍은 창의성을 가져온다고 했던가. 전쟁으로 나일론 스타킹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자,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욕구는 더욱 창의적인 레그 웨어를 발명한다.

멋쟁이들은 마치 스타킹을 신은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주기 위해 액체 또는 크림 형태의 레그 파운데이션을 다리에 칠하기 시작했다. 백화점에는 고객을 불러 모으기 위한 레그 메이크업 서비스 바가 등장해 소비심리를 자극했다. 또한 컬러 페인팅에 그치는 것뿐이 아니라 다리 뒤쪽에 눈썹연필로 봉제 솔기 그러넣는 디테일까지 추가해 완벽하게 눈을 속였다. 한편 선 긋기에 재능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혼자 손쉽게 솔기를 그려 넣을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툴도 발명되었다.


레그 메이크업 용 '액체 스타킹' 1943 ⒸNatioanl Museum of American History
마치 '나일론 스타킹'을 신은듯한 착시효과를 주는 레그 메이크업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들  ⒸGetty images (출처: Smithsonian Institute)
디테일의 힘! 할리우드 배우 케이 벤슬의 심 드로잉 툴 시연(왼쪽 출처: perfumepassage.org, 오른쪽 출처: Smithsonian Institute)





완전히 새로운 '뉴 룩'의 탄생

2차 대전이 끝나고 난 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궁핍했고, 영국은 의복 배급제도를 1950년까지 지속했다. 그러나 좌절로 가득 찬 시대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이 살아있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욕구를 간파하고 시의성 있는 상품으로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패션 디자이너는 바로 크리스찬 디올(Chirstian Dior)이었다. 1947년 크리스찬 디올이 발표한 컬렉션은 전쟁으로 인한 암울한 패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새로운 스타일 '뉴 룩'이었다.


Your dress have such a new look!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 카멜 스노우(Camel Snow)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을 예감하며 디올의 컬렉션을 '뉴 룩'이라 불렀다. 꽃부리를 뒤집어 놓은 듯한 코롤 라인(corolle line)의 스커트, 잘록한 허리와 페티코트, 부드럽게 경사진 어깨의 뉴룩은 군복처럼 딱딱한 의상에 신물 난 대중을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18미터의 풍부한 직물을 사용한 디올의 스커트는 부분별 한 낭비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잘록한 허리를 위해 착용해야 했던 코르셋은 여성을 다시 속박한다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대중은 피폐한 마음을 달래 줄 아름답고 풍요로운 시절의 향수를 원했고, 디올은 여성을 꽃에 비유(flower woman)했다. 여성은 뉴룩과 함께 다시 낭만을 꿈꿀 수 있었다.


뉴 룩은 삽시간에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며 프랑스 국가 경제를 이끌었고, 나치 치하에서 황폐해졌던 파리 패션의 자존심을 회복했다. 크리스찬 디올을 비롯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피에르 발망, 위베르 지방시 등 프랑스의 꾸뛰리에(couturier)들이 선보인 우아한 프랑스의 하이패션은 십여 년간 트렌드를 주도했다. '뉴 룩'을 시작으로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47년 2월 12일 크리스찬 디올의 데뷔 컬렉션에 등장한 바 슈트(Bar suit)에 사람들은 경탄했다. '뉴 룩'이 탄생했다. ⒸChristian Dior
새로운 패션 시대를 연  '뉴 룩'. 1947년 오리지널 컬렉션 버전(왼쪽)과 2015년  디올 전시 포스터 버전(오른쪽) ⒸChristian Dior
1940년대 후반 디올의 의상들.  뉴 룩 이후 지배적인 패션 코드는 '극강의 우아함'이다. (왼쪽) ⒸCondé Nast / (오른쪽) ⒸGetty Image




디올은 자신이 여성에 대해 잘 안다고 말했다. 그는 꽃 같은 여성을 디자인 함으로써 전쟁의 상처 속에서 사람들에게 결핍된 낭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당대 여성들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으며 어떤 이미지를 갈망하는지 이해했다. 혹은 소비자 자신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욕망을 읽어내 디자인을 기획했고, 적중했다. 위대한 디자인은 그렇게 결핍과 욕망 사이에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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