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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월 Apr 23. 2023

엄마는 나를 보낸 날, 할머니를 보냈다.

엄마가 느낄 상실감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지금 나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응우라우 공항에 있다.

지난주 토요일인 2023년 4월 15일 토요일, 결혼식을 했고 다음날인 일요일 출발해서 7박 8일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7년간의 연애의 맺음,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었던 나의 결혼식.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의 결혼 준비 내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작년 7월 새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엄마는 여전히 시골에 살고 있다.

아버지의 친인척들이 모여있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아버지를 기억하며 살고 있다.

처음엔 여러 번 올라오라고 설득했지만, 엄마는 그곳이 좋다고 했다.

과연 그게 엄마의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득하는 걸 포기했고 때로는 엄마가 올라오고 가끔은 내가 내려가며 가족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우리 부부와 엄마는 각자의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뒤풀이를 즐기며 술을 하고 있던 그때, 엄마의 전화에 문득 불안해졌다.


"OO아, 할머니 돌아가셨데..."

이미 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엄마는 할머니의 소식을 전했다.


사실 할머니가 한 달 전 정도부터 몸이 많이 쇠약해지신 상태였다.

올해 1월쯤, 할머니가 계시던 요양병원에서 염증수치가 높게 측정되어 큰 병원을 방문했고

여러 가지 검사와 약 한 달간의 입원 생활 뒤,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겨 가셨다.


급성 요로감염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고,

갖은 검사를 진행했을 때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연세도 워낙 많으셨고 암덩어리가 대동맥 옆에 붙어 있어서 수술은 당연히 어려웠다.


암이 커지고 번지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진 않을 거라고,

다른 건강이 괜찮으시다면 2-3년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간 할머니의 기력은 점점 약해졌고

급기야 식사를 못하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액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하는 게 전부였다.


3월, 어느 때와 다름없이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할머니의 주 보호자로 등록되어 있는 나에게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고 많이 위독하시다는 이야기에 시골에 내려가서 엄마를 태워왔다.


주 혈관이 막혀서 수액 공급이 어렵고, 할머니가 아무래도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으신 거 같다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생각보다 오래 버티셨다.

결혼식 한 주 전, 할머니 면회를 갔고 할머니는 목소리는 내지 못하셨지만 나와 엄마의 눈을 분명히 마주했고 결혼식 하고 신혼여행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예쁜 옷 사서 올 테니 나랑 같이 나가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는 지금 정신력으로 버티고 계시는 거라며, 신기하다고 했다.

"손녀딸이 너무 예뻐서 결혼식까지는 기다려주시지 않을까요? 대부분 약속하시는 어르신들은 기다리시더라고요."라고 얘기했다.


제발 결혼식까지 할머니가 버텨주기를,

내가 신혼여행을 떠났을 때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지 않기를 바랐다.


너무나도 연약한 우리 엄마는,

내가 없을 때 와장창 깨져버릴 것 같은 마음이 가장 컸다.

유리창에 잔 실금들이 있다가 하나의 작은 터치에 무너져버리는 것처럼 나의 엄마도 그럴 것 같았다.


-


보통 병원에서 주 보호자로 등록된 나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날은 내 결혼식이라 나에게 전화하지 않고 엄마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고 한다.


엄마는 다행히 내가 있던 장소에서 뛰어서 1-2분 거리에 있었고

바로 뛰어가서 엄마를 챙기고 택시를 잡고 할머니에게 갔다.


병원에 도착해서 마주한 할머니는 마치 잠을 자는 듯했다.

손도 얼굴도 너무 따뜻해서 "할머니"라고 흔들어 깨우면 일어날 것 같았다.


할머니가 정신이 있을 때

내 할머니라서 고맙다고, 너무 사랑한다고 말을 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주변 사람들의 부재를 겪을 때마다 나는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온 힘을 다해 울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정신을 차려야 했고, 그 이후의 일들을 내가 처리하고 감당해야 했기에 난 버텨야만 했다.

다만 이번엔 나의 몫이 될 수 없기에 한참을 울 수 있었던 것 같다.


-


장례식장 계약까지 모두 마치고, 나와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의 장례 때문에 신혼여행을 미룰 수는 없었다.


사실 이러한 일이 닥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 번 고민을 했었지만

이는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문제였고,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


여행을 떠나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짐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다.


입관식을 하고, 제사를 지내고

할머니가 차려준 마지막 밥을 맛있게 싹싹 긁어먹고 그리고 신혼여행길에 올랐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고

오히려 내가 한국에 없었어서 다행이라는 친척동생의 말을 들으면서 가장 걱정이 되는 건 역시나 엄마였다.


하지만 모두를 보내버린 엄마는 오히려 강해졌다.

강한 척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한결 괜찮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고 내 역할을 친척 동생이 대신해주고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나 대신 엄마를 위로하러 갔고

"엄마 안 울었어. 생각보다 잘 버티고 계시더라. 이제 안 운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너한테 꼭 이야기해달라고 했어."라는 말을 들었다.


내 결혼을 하루 앞둔 엄마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는

"내일이면 엄마품 떠나네^^"라고 되어있었다.


사실 나는 엄마 품에서 생활한 건 초등학생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는 엄마를 더 외롭게 만드는 것 같았다.


-


엄마는

하나뿐인 딸을 보낸 날,

하나뿐인 엄마를 보냈다.


-


난 내 몸에 그들과의 추억을 새겨 넣을 만큼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무척 사랑했고 사랑한다.

나와 남편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행복한 기념일이 나에게 할머니의 기일이라는 슬픈 시간으로 남겨질 예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는 언제나 고통스럽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미 여러 번의 부재를 겪으면서 그 상실감에 익숙해지고 더불어 성장하고 있다.


-


어린 나이에 남들보다 많은 일들을 겪으며 나는 성장했고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들이 되었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힘든 순간들이지만, 돌아서 생각해 보면 이는 나에게 하나의 기억으로 남게 된다.


행여나 결혼식이 잘못될까 봐, 식이 모두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 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 마음을 기억하며 나와 남편은 더 행복하게 이해보다 인정하며 그렇게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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