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솔직히 말해봐, 우리집 가난해?

스무살

by 도무지

나는 고등학생 때, 용돈을 3만 원씩 받았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면 얼마나 받을까 기대했었다.

왠지 모르게, 고등학생 때 남들보다 적게 받은 용돈이 대학생이 되면 배가 되어 돌아올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20살이 되던 해, 엄마는 교통비를 포함해서 월 20만 원의 용돈만 쥐어줬었다.


‘도대체 이걸 가지고 어떻게 놀고먹으라는 거지?’


학식이 아무리 저렴하다고 하지만

학식 먹고 지하철 몇 번 타면 시중에 남는 돈은 없었다.


친구들과 용돈 얘기를 하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였다.


마치 초/중/고로 치면, 설날 때 친인척에게 받은 세뱃돈을 가장 못 받은 사람이고

직장인으로 치면, 월급이 제일 적은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친구들은 최소 40만 원부터 시작해, 아예 엄마 카드를 들고 다니며 돈 걱정 없이 쓰던 친구도 있었으니까.


우리집이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엄마의 교육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같은데’라는 추측일 뿐이다.


나는 항상 당시 친구들에게 칭얼대며 이야기했다.

“우리 엄마 경제 교육 방식이 이래~ 짜증나 정말~”

그럼 아이들은 끄덕이며 이해해 줬으니까.


나는 그 시절 정말 다양하고도 많은 아르바이트들을 했다.


문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용돈을 끊어버리는 엄마였다.

돈이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아르바이트를 했더니 돈을 끊다니.


학교 갔다가 아르바이트하고 집에 오면 나의 하루는 끝이 났고, 친구들이랑 놀고 싶으면 큰맘 먹고 약속을 잡아야 했다.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서 어쩌다 한번 놀러 가면

그마저도 술집이었다.

중고등학생 때와 대학교 친구들 예외는 없었다.


술도 한 모금 안 마시는 내가

술값을 번번이 계산해야 하는 게 너무 아까웠다.

한번 술집을 가면 N빵을 해도 몇 만 원씩 나오니 손이 덜덜 떨리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돈이라도 많았으면 즐기고 오는 건데

내게는 즐길만치의 돈이 있지 않았으니까.


이제 막 스무살이 되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언제부터 술 없으면 못 놀았다고 저렇게 술노래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돈 때문에 더 교회에 마음이 갔던 것도 있었다.

교회에서는 커피 한잔으로도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


어떨 때는 커피값마저도 아까워서

어른들이 마시는 쓴 맛의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웩- 도대체 이딴 걸 왜 먹는 거야?‘


초딩 입맛을 꾸준히 유지해 왔던 나는

스무살이 되고 아메리카노에 재도전했지만,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맛에

’민트초코‘를 줄기차게 찾았다.

역시 음식에 진심인 나였다.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서 여유를 부릴 정도로 돈이 많지는 않았다.


옷도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10,000원짜리를 잘 수집해야 했고 신발도 슈펜에서 10,000원짜리로 골라 신었다. 화장품은 사치에 가까웠다.


지금은 만 원으로 살 수 있는 옷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만 원이면 웬만한 건 다 살 수 있었다.


그래도 스무살은 뭘 입어도 예쁜 나이 아니던가.

질보다 매일 옷이 바뀌는 양이 중요했으니까.


또한 나는 173cm의 소유자라, 뭘 입어도 옷걸이가 돼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물론 키가 계속 자라 175cm가 된 것은 유감이다.


언니의 옷을 뺏어 입다가 싸우기도 하고

서로 니옷 내옷을 따져가며

우리집은 두 딸의 새로운 옷으로 돼지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화장품을 사치라고 생각한 이유가 또 있다.

물론 작은 쉐도우 하나에 5000원이 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내게 손재주가 매우 없었다.


화장을 해서 잘하는 것 같으면

더 사보고 열심히 연습했을 텐데,

모두가 내게 “너는 화장 안 한 게 훨씬 낫다.“라는 말을 하던 시기였다.


저 말을 듣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들으니까 화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졌다.


게다가 화장을 거지같이 해도 고백해 오는 남자들이 있으니 상관없다고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게 내 발목을 크게 잡을 줄은 몰랐지만.


내가 이렇게 돈 없이 살면서도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사는 게 마음이 편했다.

이전부터 엄마와 아빠는 나와 언니의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셨는데,

나는 그 삶에 보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구할 수도,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엄마 카드를 쓰고 있는 친구가 ‘등골 브레이커‘라는 말을 들었지만, 어쩌면 ’등골 브레이커‘는 나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요 없는 공급’,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딱 나에게 적당한 말이었으니까.


*등골 브레이커 : 부모의 등골이 휠 정도로 부담이 가는 금액을 사용하는 자녀


그러니 당장 내 앞에 닥쳤던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어느날 영화를 보러 갔을 때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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