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 N년차, 담요 달라고도 못 해?

스무살

by 도무지

나에게는 평생 그림만 그려오던 언니가 있다.

언니는 20년간 매일 빈 도화지에 붓질을 해왔다.


입시 미술이라는 문턱을 넘자,

그림에 질려버린 언니는 붓을 내려놓았다.


언니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생각했다.

‘저러다 다시 손에 붓을 쥐겠지.‘

‘입시 때 힘들었어서 그런가 보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그런데 언니는 끝내 붓을 쳐다보지 않았고,

부모님은 급기야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아 흥미도 없는 언니를

어학연수에 보내는 것이었다.


언니는 거절하지 않고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영어에 흥미를 느낀 것을 물론,

회화 실력이 크게 향상한 것을 본 부모님.

이번엔 내 차례였다.


어학연수의 목적지는 필리핀.


필리핀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큰 기대가 없었다.

‘미국도 캐나다도 아닌 필리핀이라니,

영어 배워올 수나 있는 거야?‘

라는 건방진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인생 처음으로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는 것은

아주 떨리는 일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언니와 아빠는 공항에서

나와 함께 롯데리아 버거 세트를 먹고는

나의 출국을 배웅해 주었다.


두려움 반 설렘 반 안고 탄 비행기는

‘세부퍼시픽’이라는 외항사였다.


나는 조용히 앉아 비행기 좌석 이것저것을 만져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 한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지나가는 외국인 승무원에게

담요 하나 달라고 말도 못 꺼내겠는 것이다.

‘혹시 내가 하는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만약 내가 하는 말이 틀리면 어떡하지?’


하는 수 없었다.

오들오들 떠는 방법 외엔.


떨고 또 떨다 보니 도착한 세부막탄 공항.

어떻게 입국 심사를 마쳤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찌어찌 입국장을 나와,

시위 장면처럼 무수히 많은 팻말들 사이로

내가 가야 할 학원 이름을 찾아야 했다.


미아가 된 꼬마가 잊어버린 부모를 찾은 것 마냥

팻말을 보자마자 황급히 뛰어갔다.

혹시라도 나를 두고 가지 않을까라는 염려 때문에 뛴 것도 있었다.


내 이름을 말하고 차에 탔을 때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등

다양한 사람들로 혼재되어 있었다.


남는 자리에 앉아

두리번거리며 한 명씩 얼굴을 익혔는데

아뿔싸… 이들과 함께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간 학원은

스파르타와 세미스파르타로 나뉘어 있었다.


그 차의 다수는 세미스파르타 학생들이었고

내가 배정받은 반은 스파르타였다.

평일에는 학원 외에 밖으로 나갈 수 없고

금요일 저녁과 주말에만 갈 수 있었다.


내가 사용한 숙소는 4인룸으로,

일본인 2명과 나 그리고 서른 살이 넘은 언니가 있었다.

(사진처럼 좋은 숙소는 아니었다.)


나는 옷으로 정신없이 어질러진 공간들 사이로

빈 침대 하나를 찾아, 내 자리와 짐을 정돈했다.


룸메이트들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져왔다.

“Where are you from?”

“What’s your name?”

“How old are you?”

“How long will you stay here?”


나 혼자서만 어색한 이 공기,

속수무책으로 물어온 질문들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주일만 지나도 저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내가 될 거라는 건 감히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룸메이트와 인사를 마친 후,

첫 수업을 들어갔다.

혼자 있을 줄 알았던 그 방에는

10명 남짓한 인원이 있어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들어가야 하는 방이 맞는지 재차 확인한 후에,

쭈뼛쭈뼛 들어가 한 책상의 자리를 꿰찼다.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약속한 듯

모두 침묵을 유지한 채로 선생님을 기다렸다.


몇 명은 차에서 봤던 것 같았고

몇 명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이들 모두 나처럼 오늘 처음 온 것 같았다.


선생님이 들어왔는데 바로 영어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Hello everyone!!”

선생님 중 한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부터 정말 실전이었던 것이다.


첫 시간은 수업이 아닌 테스트였다.

시험도 보았지만 인터뷰도 찍었다.


시험은 영어 실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을 테고,

인터뷰는 연수 전후 얼마나 향상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테다.


필리핀은 열두 달 내내 여름이다.

그래서 테스트를 보는 동안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는데, 나는 추위를 강하게 느끼면서도 또 춥다는 말도 못 했다.


‘에어컨을 꺼 달라고 말을 할까?’

‘그냥 춥다고 말을 할까?’


스스로 영어를 못 하는 축에 속하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금붕어처럼 뻐끔거리기만 하는 내 입을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테스트는 안 봐도 뻔한 결과였다.


인터뷰와 테스트가 끝나고 시작된 진짜 영어 생활,

나는 영어와 진짜 친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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