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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찍 은경

by 초동급부
삼철에게...

어제는 입사 이후 정식으로는 처음으로 회식을 했어.
술자리는 몇 번 가졌었지만 공식적인 회식은 처음인 거지. 나름대로는 그냥 재미있고 좋았어. 밥을 먹고 2차를 가는 동안 몇 명이 빠지고 2차가 끝나고 3차를 가는 동안 또 몇 명이 빠지구. 다시 집으로 갈 땐 5명밖에 없더라. 술은 자기 주량껏 알아서 마시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인데 왜들 그러는 건지... 참 회식이라기보다는 환송회였어. 지금 본사에 같이 있다가 공장으로 발령 난 사람이 있거든. 그래서 이래 저래... 참 안 돼 보이더라. 겉으로는 웃고 있고 괜찮다고 얘기했지만 사람이 너무 착해서 탈이라는 생각이야. 기분 좋은 자리였어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지만 자꾸만 마음이 우울해지는 거 있지.

파도타기르 하면서 줄을 마셨는데... 안 마실 수도 없고 참, 곤란했어.
밑에 미리 따라놓은 맹물잔과 소주잔을 바꿔치기해가면서 맹물이 소주인양 인상을 박박 써가면서 마셨다. 아직도 깜찍 은경의 수난시대가 지나지 않았는지 한 번씩 돌아갈 때마다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도 연신 깜찍이를 외쳐대는 통에 여사원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잔을 많이 받았을 거야. 주는 대로 다 마셨더라면 족히 소주 1~2병은 먹었겠지만, 술에 약한 나로서는 게다가 소주 알레르기까지 있어서 요령껏 아주 재미있게 피해 넘어갈 수가 있었어.(하지만 환송회가 아닌 그냥 회식이었다면 마음이 더 편했을 텐데 말야) 2차로 단란주점을 갔는데 몇 명이 빠지는 바람에 젊은 사람이 별루 없어서 나와 또 나랑 잘 어울리는 한 언니와 마이크를 잡아가며 기쁨조가 되기도 했어.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 소리 꽥꽥 질러가며 부를려니 나도 죽을 맛이고 듣는 사람들도 괴로워했을 텐데... 월요일 회사 가서 핀잔이나 먹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 된다.

근데 깜찍 은경이 서서히 치매은경으로 변해가고 있어.
어제 퇴근 무렵에 이사님이 심부름을 시켰는데 한 가지를 빼먹고 안 사갔거든. 그랬더니 큰 소리로 사람들이 다 듣게시리

"깜찍 은경, 너 이름 치매은경으로 바꿔야겠다."

하시면서 금방 시킨 걸 잊어버린다구... 깜찍 은경이라고 불리는 것두 부담스러운데, 이젠 치매은경이라니... 세상 살기 싫다. 에이, 쒸. 처음 우리 이사님이 그렇게 부른 이후로는 다들 이름 부를 때 '깜찍'자를 꼭 붙여서 부르곤 해.

저녁에 학원 다닐 때도 (계장님 차를 타고 다니거든 , 사무실에서 3명이 배우러 다녀) 뒤에서 내가 아무 말 안고 가만있으면

"깜찍 은경 탔냐?" 또는 "깜찍 은경 문제 좀 내봐"

이젠 뭘로 바꿔야 할지 고민이야. 놀림감이 안 되는 걸로 바꿔야 하는데, 당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젠... 것두 인정 못한 데잖아. 우쒸. 인정도 안 하면서 부르기는 왜 깜찍 은경이라고 부르는지, 그치?

오늘은 말이 좀 많았다. 원래 그렇긴 하지만.
토요일이야, 쉬는 날이라서 그냥 집에 있으면서 네 생각이 나길래 쓴다. 어젠 회식하고 들어와서 그냥 잤거든.
이따 오후에나 나가 봐야지.
그럼 다음에 또 편지 쓸게.


1998. 11. 21.


편지에서도 숱하게 봐 왔던 깜찍 깜찍 깜찍

겉봉투에 '깜찍 은경'이라고 떡하니 써놓고 심지어 '깜찍이 소다'라고 쓴 편지도 있다.

깜찍 은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깜직이 소다가 무슨 소리인지 물어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가 언제냐'라며 얼버무린다. 일종의 묵비권이다. 여러 지난 일들에 대해 물어도 답변은 대부분 동일하다. 물론 그럴 수 있겠지만 이 '깜찍이 소다'는 다소 반응이 다르다. 스스로도 민망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나이가 50이니... ^^

우리 깜찍 은경님께 이런 수난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최초에 왜 깜찍 은경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가 너무도 궁금하여 당사자에게 물었으나, 역시 동일한 답변으로 사실상 진술을 거부했다. 본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으로 심히 안타깝긴 하나 본 진술에는 신빙성이 있는 듯하다.


놀림감으로서의 민망과 난감 그리고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불러대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담고 있는 편지 어디에도 스스로의 깜찍을 부정하는 부분은 찻아볼 수 없다. 이 편지의 가장 큰 차밍포인트다.


아내는 실제로 아담하고 애교가 많으며 발랄한 성격이다.

50이라는 나이가 코 앞이고 2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고 있지만 난 아직도 가끔 그녀가 귀여울 때가 있다.

오늘 아침에는 선반에 있는 에어프라이어를 내려 달라고 했다. 겨우 내손이 닿을 정도의 높이이기에 손잡이가 달린 음식을 넣는 통 부분을 먼저 빼고 아랫부분을 잡아야 작업이 용이하다. 이 부분을 먼저 내려서 아내에게 주었더니 그것을 머리에 이고 나를 보며 웃는다. 오늘도 귀여웠다.



나는 인정한다.

은경이는 깜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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