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

by 초동급부
삼철에게.

아침에 출근하는데 안개가 자욱한 게 참 멋있드라.
음... 시골의 아침 같았다고나 할까. 처음인 거 같았어. 바로 앞 10M도 분간할 수 없었는 걸. 이런 날 회사 가는 거 참 싫더라. 언제나 싫긴 하지만, 나 참 게으르지? 일하는 것두 싫어하구 그저 노는 것 만 좋아하니깐. 근데 노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편두 아닌데... 좌우지간 나도 좀 특이하지?

오늘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교육이 있었거든. 그래서 우리 사무실에서 좀 떨어진 여의도역 부근에 있는 곳으로 가서 교육을 받았어. 3명이서 . 4시쯤 끝날 줄 알았던 교육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 그대로 회사 들어가기 싫구 해서 근처에 있는 파파이스에 가서 콜라와 비스킷을 먹으면서 언니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갑자기 2층에서 교복 입은 학생들이 떼거지로 내려와서는 카운터 근처에 서서 이쁘다느니 캡이라느니 그러지 않겠어. 우린 무슨 연예인이라도 떴나 싶어서 한 학생을 붙잡고 물어봤더니 김현주래 그제서야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있는 김현주가 보이더라구 짧은 치마에 부츠 모자. TV에서 보다 훨씬 예쁘고 날씬하더라. 실물이 훨씬 괜찮은 거 같았어.
근데 절말 애들은 애들이더라. 언니들이랑 나는 그냥 밍숭맹숭 쳐다만 보고 말았는데 학생들은 사인 받고 난리가 났더라구. 나는 예전에두 연예인을 봐두 싸인같은 거 안 받았는데. 솔직히 그런 거 받아서 뭐햐냐. 종이조각에 불과한 걸.

근데, 내가 보기엔 너두 별 수 없었을 거 같애. 이쁜 여자 좋아하는데 당연한 거지 근데 이쁜 여자 좋아한다고 하니까 말인데. 남자들은 다 짐승이고 속물이야. 얼마 전 TV를 보니까 남자가 여자를 고를 때 제일 처음 보는 게 외모, 두 번째가 몸매, 세 번째가 키. 지들은 뭐 잘난 거 있다고 여자 겉모습만 보그 그렇게 따지는지. 나같이 못생긴 애는 평생가도 남자 하나 없게 생겼지 뭐. 너두 이쁜 여자 좋아하는 거 보면 어쩔 수 없는 남자에 짐승이야. 게다가 너는 여자한테 대하는 태도하고 남자한테 대하는 태도도 다르잖아. 어휴 속물.

속물아! 잘 먹구 잘 살아라. 은경이는 나중에 또 편지 쓰마.

1998. 12. 14.


P. S. 내가 장난 좀 쳤다고 삐진 거 아니지?
삐졌으면 화 풀어 ~ 응?


엥? 갑자기?


콜라와 비스킷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여 배우는커녕 여자 사람 하나 보지 못했을 텐데... 아니 여의도는커녕 충주의 산속에서 멍멍이 고생을 하고 있었을 것인데...

난 느닷없이 짐승이 되고 속물이 되었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나이의 학생들이 TV에서만 보는 연예인을 실제로 보게 되어 반갑고 신기해서 호들갑 떨며 사인을 받는 것도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진대...

나안~ 느닷없이 짐승이 되고 속물이 되었을 뿐이다.


오래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소개팅 전 남녀의 차이점 이랬던가...


여자 : 어느 회사 다녀? 연봉은?

남자 : 이쁘냐?


여자 : 어디 살아? 아파트야?

남자 : 이쁘냐?


여자 : 학교 어디 나왔데? 전공은?

남자 : 이쁘냐?


남자가 여자의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나도 사내로서 인정한다.

하지만 모든 남성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예쁜 여성을 좋아하지만 외모 이외의 것들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나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방향은 유사할 수 있지만 정도와 비율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더더욱 그리고 명백히 그렇다.

여성과 남성을 대하는 태도에 다소 격차가 있는 것은 남중, 남고를 다녔고 다소 터프한 성격이다 보니 이성에 대한 사회화가 덜 되었기에 제삼자의 시각에서는 일견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더더욱 그리고 명백히 그렇다.

편지 속 그녀와 결혼해 잘 살고 있는 현재의 내가, 지금의 그녀가, 우리의 아이가 이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아울러, 그녀가 자필로 자인한 움직일 수 없는 확증을 제시하는 바이다. ^^

'나같이 못생긴 애는 평생가도 남자 하나 없게 생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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