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철
우와! 힘들다. 오랜만에 방청소를 했거든.
물론 쓸고 닦고 하는 거야 엄마가 해 주시지만 그런 거 말고 여기저기 치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거 회사 다닌다는 핑계로 힘들고 지겹다는 이유로 미루고 미뤄왔던 일이야. 한 번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 시작하기가 참 힘들다. 옷장두 정리하고 화장대며 옷걸이, 책장, 기타 등등. 다 치우고 너한테 편지 쓰는 거다. 나 청소도 하고 착하지? 그럼 그럼...
오늘 크리스마스카드를 썼어. 너한테. 정말 이쁜 걸 보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솔직히 내 안목으론 도저히 어떤 것이 이쁘고 아름(?) 다운지 모르겠더라구. 카드에도 쓴 얘기지만 내년뿐만이 아니고 앞으로 네가 소망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길... 은경이두 빌어줘야 해. 다 바랄 수야 없지만...
근데 청소하구 그래서 그런지 배고프다. 너한테 편지 쓰면서도 계속 꼬르륵거리는데 어쩌지? 우와. 배고픈데. 근데 뭐 먹을 게 없다. 살찔 텐데 그냥 잘까? 한시가 넘었거든. 그냥 우유나 한 잔 마시고 자야겠어. 넌 밤에 배고프면 어떻게 해? 군에서는 봉지라면이란 게 있다며. 말이 봉지라면이지 그걸 먹을 수 있을까? 원래 컵라면에 나오는 라면만 면발이 얇지 않어? 그냥 보통라면은 좀 굵잖아. 근데 물 부어놓고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이게 아닌가? 군인들을 위해서 새로 나오는 라면인가? 에라 모르겠다.
암튼 넌 배고프면 어쩌는지 궁금하다. 훔쳐먹을 것도 없을 텐데. 그치? 다 알아. 그냥 잘 수밖에 없겠지. 너 같은 먹보가 참 안 됐다. 에이, 인심 썼다. 그래 너 특박 나오면 은경이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먹고 싶은 거 다 얘기해 알았지?
요즘은 날씨가 좀 덥다. 아니 덥다기 보단 작년보다 10도나 오른 기온이래.
그래도 거기는 춥지? 몸 조심해. 감기 조심하구.
그럼 다음에 보자. 안녕.
1998. 12. 17.
P. S. 펜이 안 좋아서 잘 보이지 않는 글자도 많을 거야. 짜증 나지...
그래 그게 아닌 것 같다.
나 또한 봉지라면, 일명 뽀글이는 말로만 들었다.
면을 최대한 잘게 부숴 스프를 넣은 후 뜨거운 물을 붓고 완벽하게 밀봉한 다음 시간이 지나 면이 익으면 죽처럼 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맛보다는 느낌이 심히 괴상할 것 같지만 먹어 본 사람들은 몹시 맛있다고 한다.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내가 입대한 1998년에도 우리 소대에는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세탁기 심지어 에어컨도 있었다.
물론 에어컨은 사람을 위한 용도가 아니라 상황실에 있는 고가의 전자기기들의 보호를 위해 설치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헌병은 야간근무를 하기 때문에 마친 후에는 으레 가스레인지에 라면을 끓여 먹는다. 한 달에 10~20 봉지 가량의 라면이 공식 보급품으로 지급이 되었고 가끔은 '새참컵면'이라는 이름의 촌스러운 뚜껑의 컵라면도 받았다. 웬만한 마트정도 되는 규모의 BX(육군의 PX)도 있어서 돈이 있다면 시중에 판매되는 각종 라면들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먹을 수도 있었다. 뽀글이 생각을 전혀 할 필요가 없는 환경이었다.
근무를 마치면 다수의 인원이 함께 복귀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보통 쫄따구가 라면을 끓인다. 이병 때 면을 4등분 했다며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라면의 면은 정확히 2등분 해야 최고의 맛이 난대나 뭐래나...
하지만, 야간근무가 없는 날 배가 고프다면 그녀의 말대로 쫄따구는 딱히 먹을 게 없었다.
있어도 눈치가 보이고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 바빠 먹기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나 같은 먹보(?)가 참 안된 것도 맞네 뭐... 지난 편지에서는 속물이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먹보다.
부인하기는 어렵다. 나는 어떤 음식이든 잘 먹고 많이 먹는다.
이런 나를 보고 아내는 말한다. "자기의 유일한 매력포인트야!"
뭐든지 맛있게, 복스럽게 흡입하다 보니 함께하는 사람들까지 즐겁고 무엇보다 음식을 만든 사람이 흐뭇하다고 한다. 그러니 복이 많아서 자기 같은 훌륭한 여자를 만났대나 뭐래나...
이런 매력포인트라도 있어서 훌륭한 아내를 만난 먹보 남편은 참 행복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