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사용법

by 초동급부
삼철에게

벌써 낼이면 설이구나.
참 생각지도 못한 시간들은 빨리도 지나가는데... 요즘 잘 지냈어? 네 목소리 들어본 지도 오래됐네. 전화 오면 다리 좀 괜찮느냐고 물어보려구 했는데. 2주 후면 깁스 푼다고 했지. 네가 이 편지 받을 때쯤이면 아마도 그때쯤이지 않을까? 고생했네. 앞으로는 조심해 다쳐봐야 너만 손해잖아.

사는 게 참 무의미하고 어쩌면 부질없다 생각이 든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고 또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를 뿐이지 죽음은 항상 곁에 있는 건데 말야. 사람 사는 게 너무 허무한 거 같애. 어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의 상갓집에 다녀왔어. 친한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위가 좀 안 좋긴 하셨지만 돌아가 실정 도는 아니구 아마 술 드시고 주무시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거 같데... 넋 놓고 앉아 있는 친구모습 보면서... 또 우리 손을 꼭 붙잡고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시는 친구 엄마를 보면서 너무도 마음이 안 좋았어. 기분도 우울하고 씁쓸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많이 살아야 칠십 년 사는 건데 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두 싶고... 정말 모르겠어.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들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것을 깨달아 무슨 행동을 취하고 싶은 건지... 그냥 잠시 잠깐 느끼는 감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일 아니니? 아무래도 내가 사는 게 내 맘에 들지 않아 느끼는 생각이겠지...

부모님께 잘해야겠단 생각이 젤 먼저 들더라.
너는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만. 그러니까 너두 편지 자주 쓰고 전화두 자주 드리고 그래. 너 나 만나면 항상 그랬잖아. 엄마가 많이 보고 싶다구... 괜히 나중에 나한테 전화하느라고 집에 전화두 못했다구 후회하지 말고. 생각 같아선 많은 얘길 쓰고 싶었는데. 그냥 잘 안된다. 며칠 이러다 말 기분이라면 아예 느끼지 못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것두 내 맘대로 잘 안돼...

설날에 가족들이 면회 갔는지 모르겠다.
삼철아! 기분이 이상해... 자꾸 울고만 싶다.
이런 날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하지만 많은 것을 바라면 그만큼 많은 것을 잃는데.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하며 이것만도 감사하며 너에게
편지 쓸 수 있는 것두 기뻐해야겠지...
그래두 자꾸 욕심이 나...

1999. 2. 15.


시간과 경험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는 사람을 철들게 하고 그 인격을 성숙하게 만든다.

아직도 철부지 같은 아내이지만 편지 속에서 은경이는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비교적 젊은 60대의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저녁에 문상을 갔고 이튿날 연차를 내 발인을 마치고 돌아오며 많은 생각을 했다. 상주로서 영정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그 녀석의 한마디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저 방은 정말 신기해. 방에 있으면 너무나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좋았던 기억만 계속 떠올라" 녀석 또한 나처럼 아버지로 인한 상흔이 작지 않았다.


나는 집에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다. 어머니와 자주 통화를 하지도 않았다.

나 없는 그 시간들을 내 엄마가 어떻게 겪고 있을까 항상 걱정을 하면서도 잊으려 노력했다. 너무도 뻔한 그분의 시간들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음을 무척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들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어쩔 수 없음도 동일하다.

당시의 설에 부모님과 두 형이 면회를 왔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의 존재에 대한 기억뿐 구체적인 광경도 대화내용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군대라는 곳의 유일한 장점이 가족으로부터 잠시 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이다.


'그래두 자꾸 욕심이 나...' 마지막 한 줄이 가슴에 와닿는다.

이렇게 울고만 싶은 날에는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마음의 간절함이 더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에 그 마음이 욕심이라는 뜻이리라. 어머니에 대한 내 마음도 그랬지만 엄마와는 다르게 그녀에 대해서는 나도 많이 욕심을 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른이라는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어김없이 시간과 경험들 그리고 크고 작은 상처들과 함께 해 왔다. 그녀와 나의 욕심도 하나의 상처로 우리가 어른이 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두 사람 모두에게 상흔으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는 추억이라는 단어로 치환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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