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 중간고사 성적표를 집으로 발송하는 시점이 대게 어버이날 즈음이었다. 담임선생님은한 사람도 빠짐없이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편지를 쓰라하셨다.
성적표도 동봉하겠노라는 말도 함께...
아! 성적표를 어떡하나... 난 살고 싶었다.
문득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신의 한 수 - 성적표를 옆집으로 보낸다.
(설마 생활기록부 주소까지 확인하진 않겠지^^)
옆집은 우체통이 밖에 있어서 인터셉트가 가능했다.난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부모님 전상서를 썼다.
'쓰라고 하니 쓴다마는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이런 생각으로시작했지만 쓰면서 죄송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엄마도 보고 싶고 뭐 그랬다.
특히, 성적표의 고의적 배달사고를 예비·음모하고 있는지라 진심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편지만 생각하면 계획을 철회하고 싶을 만큼...
며칠 후,
방과 후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의 눈빛이예사롭지 않다. 어머니는 일을 하셨으니 한가로운 오후시간이 아버지와 단둘이 되었다. 내가 가장벗어나고 싶어 했던 바로 그때다.
교복을 갈아입자 안방으로 부르신다. 앉자마자 흰 봉투가얼굴로 날아든다.
“이거 뭐야 이 개**야~”, “이 ㅆㄴㅁ **야~”
-아래-의 대단히 거북하고 알기 쉽지 않은 어휘는 당시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육두문자를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 본 것이다. ()는 내 속말...
- 아 래 -
이게 성적이냐? 이 xxx yyy zzz!
(성적푠데 성적이겠지 뭐...)
네 까짓게 하는 거라고는 학교 다니는 것 밖에 없는데 뭐가 부족해서 이래~ 어?
이 개, 소, 말, 사마귀, 흡혈귀만도 못한...
공부를 못하면 정직하기라도 해야지~ 이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등등
(뭐 그리 못하지도 않았구만, 아놔 집배원 아저씨~ ㅠㅠ)
내가 너 같은 개**만도 못한 **때매 잘 나가던 시골을 떠나서, 이 고생을 하는데...
이 ¢£¥∬∀№¿ 야~
(뭐 그리 대단히 잘 나가셨다고 맨날... -_-)
염ㅂ부모님 전상서는~ 어쩌구 저쩌구...
(진심은 통한댔는데... ㅠㅠ)
투철한 사명감 및 직업의식을 두루 갖춘 우체부 아저씨께서 부친의 함자를 기억하고 9호를 6호로 잘못 쓴 것이라 여겨 우리 집 우편함에 문제의 봉투를 정확히(?) 삽입한 것이다.
1시간이 훨씬 넘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정말 죄송해서 꿇라고 하지도 않은 무릎을 자발적으로 꿇고 발가락 한 번 꼼지락 대지 않고 석고대죄했다. 시작과 함께 두어차례 따귀를 맞았고, 7:3의 비율로 엄마와 아부지를 생각하며 쓴 부모님 전상서는 급기야 동그랗게 구겨져서 사정없이 내 얼굴로 날아들었다.
“꺼져~” 이 말을 끝으로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이게 웬일인지 발목이 펴지지 않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감각이 없다. 마치 다리가 없는 것 같다. 너무 무서워서 쥐가 난 줄도 발이 저린 줄도 모르고 꾸지람을 들으며 울고만 있었던 것이다.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방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건 물론이고 그런 모습을 보고 또 소리칠까최선을 다해 겨우 일어섰다가다시 쓰러졌다. 4~5회 이 행동을 반복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며 비웃음과 함께 아버지가 하신 한마디...
“병신~ 육갑하네~”
이 말을 들은 직후 나는 서기를 포기하고 기어서 안방을 나왔다. 흐르는 눈물, 콧물을 훔친 손으로 바닥을 짚으니 미끄러져 얼굴을 바닥에 찧기도 했다.
살면서 지금까지도 그때처럼비참했던 적이 없었다.
“내가 사람이긴 한 건가?”
내방으로 돌아와 떨어지는 눈물조차 느껴지지 않는 다리를 주무르며 난 다짐했다.
'절대로 아버지 앞에서 웃지 않을 거야!!!'
웃음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어떤 형태의 앙갚음인지왜 그런 다짐을 했는지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육갑하는 병신을 향한비웃음의 충격에서 기인한, 다시는 아버지에게 우습게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였던 것 같다. 실제로 오래도록 실천한 다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