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차가 크고 대체로 지나치게 느리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국방부 시계처럼 새 학교의 시간도 흘렀다.
태어나서 가장 긴 일주일도 다 지나가고 내일은 토요일, 식구들이 모두 서울로 이사 온다. 광주에 있는 큰 누나랑 나랑 잘 놀아주는 짜근형 이랑 엄마도 오신다.
반 친구들도 교실도 조금은 익숙해졌고, 싸나운 선생님에 대한 생각도 살짝 바뀌었다. 또 두 녀석과 싸워서 멋지게 이겼다. 말에 제약이 있으니 주먹이 앞섰던 것도 같다. 서울 아이들은 일상어처럼 사용하는 욕에 대한 문화충격으로 빚어진 활극이었다. 이후 아이들이 한결 조심스럽게 대했고 몇몇 친해진 친구들도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식판을 나는 도시락을 놓고 같이 점심도 먹는다.
금요일 마지막 수업은 국어시간, 선생님께서 한 아이를 시켜 교과서에 실린 한 편의 글을 읽게 하셨다. 그것은 내 또래의 아이가 잠시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서 느끼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적은 수필이었다.
낭독하는 아이보다 훨씬 빠르게 속으로 읽어 내려가던 나는 첫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울고 말았다. 울지 않으려고 정말 입술을 깨물며 참았지만, 결국 엉엉 울어버렸다. 내가 너무 많이 울어서 수업이 잠시 중단되었다. 반 아이들은 놀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들이 되었다.
가장 친해진 친구는 바로 뒷자리의 상*이었는데, 내가 전학 와 처음으로 주먹다짐을 한 아이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내편이었다. 상*이는 또 내 짝꿍을 무척 싫어했다. 짝꿍이 나를 울렸을 것이라며 진심으로 광분하여 선생님은 상*이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짝꿍에 대한 변론 한마디 해줄 수 없을 만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울고 또 울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하시던 선생님도 엄마 생각나서 그러느냐며 어깨를 다독여 주셨다. 엄마는 아직 서울에 오지 않으셨냐고 물으셔서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내 갑작스러운 통곡의 연유도 아이들에게 짧게 알려주셔서 민망함이 다소 덜해졌다. 몇몇 아이들이 와서 위로의 말을 건넸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상*이는 오래 내 등을 다독여 주었다.
선생님의 배려로 얼굴을 씻고 와 빠르게 책을 덮고 나서야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얼룩지고 쭈글 해진 국어 교과서의 해당 페이지를 보고 나 스스로도 놀랐기에 그럴 수 있었다.
감성이 풍부한 건지, 주책인 건지...
나는 무척이나 창피했지만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심에 마음은 따뜻했던 것 같다. 엄마를 만나기 위한 마지막
의례를 마친 듯한, 엄마만 오면 다 잘될 것이기에 이것이 마지막 눈물일 것 만 같은 그야말로 막연한 설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의 재회라는 긍정적인 상황으로 인해 느낀 어린아이의 단상에 불과했다.
그때도 지금도 내 엄마와 눈물은 내 삶의 동의어가 되어 많은 페이지들을 채우고 있다.
넘기지 못한 국어 교과서 한 페이지처럼 어김없이 얼룩지고 쭈글 하다. 그날처럼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눈물, 콧물을 더 흘리고 대성통곡을 해서 넘김을 멈출 수 있다면 딱 서른다섯을 더 먹은 지금, 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