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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배 여사와 물만골 18화 - 큰손

by 꽃보다 마흔


큰손: 큰손은 큰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흐르고 넘쳐 남음이 있는 게 큰손이다.


지난 연휴에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정배 여사의 핸드폰이 바뀌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남편이 선물을 한 모양이다. 그동안 몇 차례 핸드폰 바꾸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얘길 했으나 무심히 듣더니 나 없는 사이에 두 사람이 해결을 봤다.

"엄마가 어디서 또 들었는지 지플립 사달라는데 그냥 최신폰으로 샀다."

여든 넘어 최신핸드폰 사달라는 엄마에게서 젊은 날의 정배 여사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잠금장치를 위해 얼굴 사진을 찍고 지문을 찍는다. 몇 차례나 거듭하는데도 잘되지 않자 남편 음성에 짜증이 스미는데 거울을 닦듯 조심스레 마음을 다잡는 게 느껴진다. 같이 주문한 스마트워치는 딸 몫이 되었다. 귀찮은 일 맡기 싫은 남편 마음이다. 젊은 우리도 기기가 바뀌면 손에 익을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정배 여사도 통화가 안 된다, 잠금장치가 안 된다며 몇 번을 오갔다. 나이 들었다고 기계마저 오래된 물건을 쓰고 싶은 사람은 없다. 특히나 큰손 정배 여사는 더욱 그럴 것이다.


내 집 하나 갖기 어렵다는 시절부터 정배 여사는 집을 지어 되팔기로 돈을 벌었다. 인부를 부리며 인부만큼 일하는, 그야말로 치마만 걸친 여장부였다. 마지막으로 지은 3층 집이 팔리지 않아 결국 그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남편을 만난 것도 그 시절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던 엄마가 고집을 내려놓을 때 그나마 집 한 채 있다는 걸 유일한 위안으로 삼은 곳이다. 사위 명의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깨끗하고 포근한 맛은 없었지만 넓은 집이었다. 안방도 거실도 부엌도, 심지어 화장실도 넓었다. 거실엔 소파와 흔들의자가 있고 그 옆엔 부잣집에만 있을 것 같은 무선 전화기가 있었다. 안방엔 정배 여사의 자부심, 열두 자 자개농과 화장대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가 시집올 때 해왔다는 두 짝짜리 고가구 장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가구였다. 자개 문짝엔 해와 구름이 산에 걸쳐 놀고 골짜기엔 폭포가 시끄러운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아래엔 학 한 쌍이 발을 담근 채 노닐고 소나무가 바위틈을 뚫고 자라 반짝거렸다. 호랑이가 나타나 학을 낚아챌라치면 안방에 물이 튈 것 같은 생동감이 가히 장인의 솜씨였다.

"엄마는 우리가 천 원만 달라고 해도 없다고 하면서도 이 농을 천만 원 주고 샀다 아이가"

시누이들의 증언이다.

"엄마는 십 원짜리 하나도 아끼면서 이런 덴 돈을 퍽 쓴다."

남편의 말이다.

"내가 이거 며느리까지 물려줄라꼬 큰맘 먹고 통영에서 대상 받은 작품을 샀다."

정배 여사의 말이다.

존재도 없는 색 같지만, 검은색만큼 화려한 색도 없다. 그 위에 진줏빛 조개 조각이 햇빛에 따라 명암을 달리하니 가구가 가구를 넘는 작품이었다. 겉만 반지르르한 게 아니라 옷장 내부도 붉은 칠을 해 놓아 문을 열 때마다 농염한 여자에게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고정핀과 여닫는 조임쇠도 탄탄해 며느리에 며느리에, 그 며느리까지 물려줘도 될만한 튼튼한 가구였다. 그러나 며느리까지 오기도 전에 자개농은 정배 여사 대에서 명이 끝나고 말았다. 광택제에 오히려 자연광을 잃은 자개도 이유였지만 리모델링 하면서 큰 짐 가지려 하지 않는 정배 여사의 결심도 한몫했다.


혼자 사니 방 2개도 필요 없다며 벽을 헐어 거실을 넓히고 혼자 살기 편하게 동선도 짧게 리모델링을 했다. 근 30년 만에 구조를 바꾼 집은 요즘 지은 새집처럼 변했다. 오래된 짐 다 버리며 단출하게 보따리 세 개만 갖고 들어가고 싶다 한 정배 여사였다.

자개농도 버리고 옷장을 붙박이장으로 해 넣어 집이 환해졌다. 자개농의 탄탄함은 잃었지만 집안이 생기를 얻었다. 다시 짐을 들이고 필요한 물건을 샀다. 소파는 우리가 선물해 주기로 했다.

"어머니, 식구가 몇 명입니까?"

소파 가게 주인이 물었다. 정배 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집 평수를 물었다. 또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 식구가 몇 명입니까?"

"스물두 명"

단출하게 살고 싶다던 정배 여사가 달라졌다. 집은 작고 식구는 당신 혼자라는 말 대신 자녀의 자녀 수까지 더해 말하는 게 아닌가. 그 식구가 한꺼번에 들이닥치기라도 할 것처럼. 집 크기는 고려하지 않고 자꾸 큰 소파에만 눈을 두니 소파가 집보다 더 커질 모양새가 되었고 내 예산과도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가는 곳마다 마땅한 게 없다며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내심, 얼른 현실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멀찍이 떨어져 정배 여사의 선택을 기다렸다. 당신 편하게 지낼 소파보다 자식들 다 모였을 때를 생각하니 소파가 점점 산으로 갔다. 결국 선택한 건 4인용 리클라이너. 찾아오는 자식은 갈수록 뜸해지고 소파는 소파보다 등받이용이 되었다.


큰손 정배 여사에게 나는 늘 간을 졸여야 하는 며느리였을 것이다. 어른들과 같이 살면서도 그때그때 먹을 만큼 밥을 하고 반찬도 때마다 조금씩 차려 먹었다. 밥솥 가득 밥을 해 놓고 푸짐하게 떠먹고 그러고도 남아야 하는 정배 여사에게는 내 작은 손이 늘 아쉬웠을 것이다. 그 습관이 비록 음식에만 해당되었을까만은, 예기치 못한 손님이 종종 들락거린 탓에 조금 넉넉해지긴 했으나 정배 여사의 바람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큰손은 바쁜 나날에 어쩔 수 없이 더 커졌는지도 모른다. 매 끼니 밥 챙길 시간 없으니 한꺼번에 많이 하는 게 습관이 되었고 사고 또 사러 갈 시간 없으니 한꺼번에 많이 사고, 오래 쓰고 싶으니 좋은 거 사느라고 저절로 몸에 밴 습관이 큰손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 되는 일일까? 넉넉한 마음 없이 되는 일일까, 차고 넘쳐 남음이 있어야 생기는 거겠지. 나를 넘어, 며느리까지 물려주고 오지 않는 자식들까지 앉히고 싶은 사랑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그러기에 안으로만 향하는 내 작음은 더 작아 보인다. 이제 나도 흘러넘쳐 자녀들과 주변에 득이 되어야 할 텐데, 갈수록 계산만 더 많아지고 손은 점점 오므려지니 큰손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정의해야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다. 그럼에도 또 한편으론 큰 척하고 싶은 건 어떻게 숨겨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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