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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배 여사와 물만골 17화 - 보통 인연

by 꽃보다 마흔

인연: 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인연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강이 한 번도 쉬어 간 적 없듯, 인연도 그렇게 흘러왔을 것이고 지금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황금연휴가 시작되었다. 엄마 생일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으니 마땅히 친정엘 다녀와야겠다. 남편은 연휴 마지막 날에 오라 이르고 딸과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아뿔싸. 연휴의 속성을 잊었다. 터미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고서야, 표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반 후에 자리가 났다. 할 수 없지. 우리에겐 카페가 있으니까 기다릴 수 있다.

버스는 부스스 내리는 비 때문인지 냉장고처럼 시원해져서 들어왔다. 한기가 든다. 안전벨트 클립마저 싸늘하다. 앉자마자 가방 속 여벌을 꺼내 목을 감았다.

발밑에는 우리 둘이 며칠 묵을 짐과 준비해 온 음식, 그리고 정배 여사가 챙겨준 갈비탕 가방이 놓여있다. 버스 타고 갈 거라 무거운 건 들고 갈 수 없다고 해도 정배 여사는 둘이서 그 정도는 갖고 갈 수 있다며 기어이 갈비탕을 챙겨 주셨다. 새지 않게 비닐팩에 넣고 또 넣고 고무줄로 묶어 안 가져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엄마, 이거 어머님이 챙겨주셨어, 갈비탕"

준비해 간 잡채를 데우고 식용유 둘러 전을 굽고 갈비탕을 데웠다. 나무토막처럼 누워있는 아빠를 일으켜 밥을 먹었다. 어느새 엄마는 뼈에 붙은 살을 발라 아빠 먹기 좋게 손질을 해놨다. 아빠는 이제, 슬로모션으로 웃기는 개그맨처럼 재빠름이라곤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도 밥상에 앉는 일도, 숟가락을 드는 일도 젓가락질도, 입으로 가져가는 일도 모두 느리고 굼뜨다. 그마저 한 번에 되지 않아 흘리기도 여러 번. 입에 넣은 음식은 이가 아파 제대로 씹지도 못한다. 겨우 먹고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있다. 딸깍 죽는 게 사람이기도 하지만 질기기도 한 것이 목숨이다.

그렇지 않아도 간간한 갈비탕에 아빠는 또 간을 더한다. 늙은 혀는 사채업자처럼 터무니없는 짠맛을 요구한다. 그렇게라도 한 그릇 먹는 게 나은지 여전히 잔소리를 해야 할지 헷갈리는 와중에 한 그릇을 맛있게 드신다. 설거지를 끝내고 앉으니 정배 여사에게 전화를 한 번 넣어달라고 한다. 감사하다는 인사가 하고 싶단다.

절에 가려고 준비 중인 정배 여사가 전화를 받았다. 자 이제 두 분의 대화를 한 번 들어보시라.

"사부인, 안녕하셨습니까? 우찌 갈비탕을 보내주셔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아이코 사돈, 값나가는 건 아니지만, 제가 먹어보니 개안아서 한 그릇 보냈십니더, 드실만했습니까? 요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아이고 참, 마음대로 안 되네요. 사부인은 건강하시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저도 그렇지도 않습니다. 안 그런척하는 거지 저도 흐렸다가 맑았다가 합니다. 우쨌거나 건강 잘 돌보시다가 우리 또 좋을 때 한 번 만납시다."

"헛, 그럼요. 어쨌거나 부족한 제 딸 이쁘다고 해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제 자식 아입니까, 예뻐도 부족해도 다 인연 따라 온 제 자식인데요. 우리가 어디 보통 인연입니까, 자식을 주고받은 인연 아입니까?"

"예, 맞습니다. 어쨌거나 참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 또 기회가 되면 한 번 뵙도록 하겠습니다. 건강하게 잘 계십시오 사부인."

늙음은 몸과 마음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아니라, 말도 마음대로 안 되는 기찬 때다. 워낙에 정배 여사가 청산유수라 아빠는 듣고만 있어도 됐지만 해야 할 말도 띄엄띄엄 겨우 하고는 전화가 끝나버렸다.

"머리가 굳어가 인자 말도 안 된다."

아빠로서, 남자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한심한 모양이다.

"아이고, 내가 아까 절에 간다고 바빠 가지고 사돈 이야기를 좀 천천히 듣지 못하고 내 할 말만 해서 영 죄송하네."

절에서 나오는 정배 여사도 불편한 마음은 마찬가지였나 보다.

말도 안 나온다는 아빠와 당신 말만 한 것 같다는 정배 여사 모두에게 조심스러운 시간이었던 건 자식의 무게 때문이다. 자식 일 아니라면 전화 한 통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일까. 내 자식 흠 안 잡히게, 내 자식 이쁘게 봐 달라는 지고지순이 아니면 무얼까. 젊어 본 적 있고 늙어 본 적 있는 정배 여사와 아빠 마음은 부족해도 그저 아름다움에 해당된다.


나는 아직, '아직'이란 말에는 지속적인 노력을 했다는 보상 심리가 든 어감이 있으니 불편하고, '지금도'라고 하기엔 무성의한 보조사 '도'가 신경 쓰이니, 그냥 수식어 없이, '나는 기억한다.'로 쓰는 게 좋겠다. 나는 기억한다. 무엇을? 내 결혼식 주례의 말을.

지금이라면 신혼여행 가서도 결혼식 이야기를 시시콜콜 글로 다 써 놓았을 텐데 그땐 그러지 않았다. 덕분에 꺼내 볼 기억도 한정적이다. 한정적이라는 건, 인상적인 것부터 저장되었단 말이 아닐까.

주례는 우리 두 사람 앞에 서서 실과 바늘을 꺼내 들었다. 부부의 인연이란 게 하늘에서 떨어트린 실이 땅에 있는 바늘귀에 걸리는 확률처럼 어려운 일이라며 귀한 인연을 축하해 주었다. 나는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는 동시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자리에 서게 된 우리가 바로 그런 인연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운동회에서 발을 묶고 결승선을 통과한 커플처럼.


강물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의 인연도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처음 만난 그날이 인연이었는가 싶다가도 우리 두 사람을 소개해 준 이를 먼저 알았으니 거기가 출발점인가 싶다가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른 도시로 가지 않고 이 도시로 오겠다고 고집부린 내가 있었고 또 그 이전에 이전에 .... 인연이 인연 되게 한 건 어느 한 사건, 어느 한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인연이 정배 여사와 아빠의 인연으로 이어진 것처럼 지금은 또 다른 인연이 맺어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한 번도 쉬어가지 않은 강물처럼, 모래를 먹고 내뱉으며 계속 뻘을 뒤집는 집게처럼 인연도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날이 갈수록 인연의 지름이 커지고 이젠 인연의 바깥이 아니라 한가운데 점을 찍고 서 있는 나를 본다. 나이가 들면 안 보이는 것도 보인다고 하니 크고 통통한 인연만이 아니라 작고 작은 인연이 다가오는 것도 저절로 알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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