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독: 여행에서 가져온 추억이 익어 갈 때 내는 소리. 피로와 실수마저 관대해지는 시간.
베트남 여독이 오래간다. 지난주, 나트랑에 다녀오신 정배 여사는 내내 주무시고 계신다. 이태 전 스페인을 다녀와 이틀 주무시고 털고 일어난데 비하면 회복 속도가 느리다. 일정도 짧고 비행시간도 짧았는데 말이다. 열무김치를 갖고 간 날도 주무셨고 카스텔라를 가져간 날도 주무셨다. 나마저 피로해 차일피일 미뤘더니 다녀오신 지 일주일이 다 돼 간다. 어제 오후에 들렸더니 또 주무셨다. 해거름에 다시 들렀더니 여느 때처럼 밥상에 앉아 금강경을 쓰고 계셨다. 반갑다고 웃는 얼굴에 아직 여독이 묻어 있다.
챙겨야 할 준비물에 수영복이 있었는데 정배 여사는 여행을 위해, 입지도 않을 수영복을 살 분이 아니다. 저녁을 먹고 호텔 야외수영장을 이용하는데, 당신만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았더란다. 그렇다고 흥 많은 정배 여사가 먼 산 구경 하듯 멀뚱히 앉아 있을 사람도 아니다. 마침 친구들이 입은 수영복이 당신 셔츠처럼 헐렁하기에 바지를 벗고 팬티 차림으로 들어가 놀았단다. 하여가! 물속에서 벗이 부르는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화려한 꽃무늬 팬티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여행이라서, 외국이라서, 눈치 보지 않고 아이들처럼 밤늦도록 물놀이를 했단다.
지난가을, 내 여행 또한 다르지 않았다. 뻔히 준비물에 수영복이 있는 걸 봤으면서도 무시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수영복 안 챙긴 사람은 나 혼자였고 수영장이며 사우나를 못 할 거라 생각하니 뒤늦게 후회돼 수영복을 사러 갔다. 시즌이 끝난 후라 마른 감나무에 까치밥 달리듯 수영복도 드문드문 걸려 있었다. 원피스 수영복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고 손바닥만 한 비키니도 두세 종류밖에 없어, 이걸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사려고 마음먹고 가서도 고민되었다. 그중 하나를 골라 사이즈를 물어보니 위에서 아래로 날 훑어보던 직원이 '빈약'이라고 읽은 듯 한줌도 되지 않는 비키니를 내밀었다. 처음 사는 비키니에 사이즈도 우리나라 표기와 다르니 입어볼 수밖에 없었는데, 핫 나 참, 이왕 사려고 하니 비키니나 외투나 예쁜 걸 사고 싶은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그 작은 것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정확히 비키니만큼을 제외하고 다 드러난 몸, 이걸 옷이랍시고 입고서 탈의실 문에 붙은 거울까지 나갈 수 있을지, 수영장과 사우나를 들락거릴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걱정은 금방 걱정도 아닌 걸로 탄로 날 때가 많다. 우리보다 훨씬 올록볼록한 몸을 가진 외국 언니들이 나보다 훨씬 작은 수영복을 입고도 당당한 걸 보니 조금씩 움츠린 어깨가 펴졌다. 그제야 수영장 귀퉁이를 벗어나 끝에서 끝까지 헤엄을 치고 얼굴만 내밀어 물에 오래 떠 있기도 했다. 마침 그때마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가 불그레한 노을을 선물해, 여독이 열 번 더 주어진데도 다시 해 보고 싶은 일탈이었다.
그날 밤부터 정배 여사와 룸메이트는 기침을 했단다. 친구는 여행 내내 기침이 심했다 하고 당신도 목이 따끔거린 채로 돌아왔다. 마침 그다음 날 일정에 '마사지'가 있어 감기와 피로를 풀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마사지는 동남아 여행의 호사 중 하나다. 보통 여행 중 한두 번쯤 경험하는데 시술사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진다. 몇 년 전, 정배 여사와 백두산 여행을 갔을 때 나는 그 가게의 오너인 듯한 사람에게 시술을 받게 되었는데 하필 그는 손 매운 남자였다.
룸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이드는 '살살'과 '세게'를 모국어로 가르쳐 줬다. 우리는 그것을 마치 금고 비밀번호처럼 달달 외우고 들어갔는데, 막상 눕고 보니 그들도 '아파요?, 괜찮아요?' 정도는 우리말로 물을 수 있었고 몸을 뒤집으라고 할 땐 뒤꿈치를 '탁' 치면서 존칭도 없이 '엎드려!'하고 반말을 했다. 나는 연거푸 살살해 달라고 말했으나 두 번만 문지르고 나면 또 손에 힘이 들어가, 다 끝나고 나올 땐 되려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정배 여사 역시 베트남어로 '살살'과 '세게'를 배웠다. 그러나, 그 며느리의 그 시어머니 아닌가, 어디가 달라도 달라야지. 정배 여사는 살살과 세게 외에 '중간'과 '약간 세게'까지 물었다. 그러게 어찌 우리 몸에 살살과 세게만 필요하겠는가? 조금 세게와 좀 더 세게, 약하게와 좀 더 약하게 등 부위마다 다른 자극이 필요할 텐데 말이다. 필사를 많이 하는 정배 여사는 어깨를 만질 때마다 아파, 정작 중간과 약간 세게는 써먹지도 못하고 '살살'만을 외쳤단다.
지난해 유럽 여행 때도 마사지를 경험했다.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비용이 꽤 나가는 호텔 스파였는데 여태 받은 관리와는 사뭇 달랐다. 조용한 일인실에서 맞춤 스파가 이어지는데 누워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호사스러웠다. 의도된 중저음에 무채색 향, 음악 소리가 그 방의 조도를 한 번 더 낮추었다. 그런 후 이어지는 손길은 마치 잔잔한 바닷물이 스치고 가는 듯해 시작하자마자 소로록 잠이 들어버려, 특별히 주문한 발바닥과 눈 주위 케어는 했는지 말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기사님은 가족도 없이 홀로 여행 다녀오는 정배 여사에게 놀라더라고 했다. 여든다섯이라는 말과 여든 넘어 세 번째 여행이라는 말에는 눈이 동그래졌다고 했다. 당신의 체력에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이젠 힘이 들어서 못 가겠다는 정배 여사의 말에, 또 그때 되면 새 힘이 날 거라고 젊은 위로를 보태고 돌아왔다.
나름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여독은 피해 갈 수 없는 여행의 과정이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피로까지 다 풀려야 여행이 마무리됐다고 할 수 있다. 사나흘 푹 쉬며 여행에서 가져온 재미와 기억을 되새기고 또 다음 여행을 기리는 시간. 피로와 실수마저 관대해지는 시간이 여독의 멋이다.
팍팍한 인생에도 때로 한없이 너그러워져야 할 때가 있다. 옆눈도 주지 않고 달리기만 할 때, 제동을 걸지 않아 꼬꾸라질 때,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고 넋이 나가 있을 때 말이다. 사흘 춥고 나흘 따뜻한 삼한사온처럼, 평일엔 달리고 주말에 쉬는 것처럼, 들이쉬면 내뱉어야 하는 호흡처럼, 너그러운 관용도 이 나이쯤이면 세련되게 갖춰야 할 소양이다. 시루 속의 콩은, 검은 이불을 덮고 물만 먹고 잔다. 무용해 보이는 시간을 견디어 콩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성분이 된다. 어쩌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이런 여독 같은 것들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