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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HOOP 리슙 Oct 19. 2023

독서할 만큼의 평화

퇴사 후 이뤄진 소원 하나


사진의 책들은 38권이다. 모두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2020년 10월 후 생긴 책들이다. 33권은 완독 했고 5권은 읽는 중이다. 다섯 권 모두 동시에 보고 있는데 정해진 순서는 없다. 집어 들고 싶을 때 집어 읽는다. 실제 읽은 권 수는 이보다 조금 더하나 옛날부터 반복해 읽어온 책들이라 뺐다.


이 중 읽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책은 야마구치 슈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이고 가장 짧은 시간이 소요된 책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이다. 전자는 완독까지 3년이 걸렸다. 오래 걸린 데에 별다른 이유는 없다.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어서이다. 후자는 5일에 거쳐 읽었는데 출근하지 않았더라면 3일 안에 읽었을 테다.




1년에 100권 이상 읽는 다독가를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3년 33권. 보다시피 1년으로 치면 그들의 10분의 1에 불과한 독서량을 자랑하려고 쓴 글은 아니다. 딱히 반성하거나 결심을 불태우려는 열의에서도 아니다. 그저 나름의 변화에 대한 작은 소회를 남기고 싶어서이다. 퇴사와 창업을 거치며 일어난 많은 변화 중 독서를 대하는 마음은 빼놓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3년 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마음 편히 독서 적 손에 꼽는다. '읽고 싶어' 읽기보다 '읽어야만 할 것 같아' 읽은 적이 대부분이었다. 과제하듯이 일하듯이 독서도 처리해야 할 일로 여겼다. 독서만 생각하면 설레는 감정보다 부담스러운 감정이 먼저였다. 압박감, 강박감, 아직 이거밖에 못 읽었나 하는 한심함, 조급함, 불안감 등등. 활자가 눈에 순순히 들어올 리 만무했다. 제 딴에는 안간힘을 썼지만 늘 더뎠다. 한때는 무엇이든 괴롭게 해야만 그만큼의 보상이 올 거라 착각했다. 그래봤자 마음만 괴롭고 페이지는 그대로다.




예전이 그리웠다. 책을 성공이나 효율이나 인정 등의 수단으로 보지 않았던 시절들. 잠을 설쳐가며 날이 밝도록 읽은 소설들. 도서관 통로 사이사이 긴장감마저 짜릿했는데. 꽉 채운 고요와 오래된 책 냄새 같은 거. 단지 거기 있어서, 궁금해서, 재밌어 보여서, 읽고 싶어서 읽었던 마음이 그리웠다. 책을 읽을 때 필요한 시답잖은 이유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는 동안 막연히 마음속에 소원 하나를 빌고는 했다.


 '예전처럼 다시 마음 편히 책을 읽고 싶다'



퇴사하면 곧바로 이뤄질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창업은 직장생활 두 배 이상의 거대한 번잡함 덩어리였으니까. 창업하고 1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마침내 이뤄졌다.


'독서할 만큼의 평화'라는 소원.


신기하다. 매출이 딱히 늘은 것도 아니고 그사이 다른 일도 많았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제 더 이상 책을 읽을 때 진절머리 나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명분 없이 그냥 읽을 수 있다. 더불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정리되는 중이다. 자뭇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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