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청명한 하늘에서 유영하는 흰구름 한 조각이 나에게 속삭인다. 벌써 또 한 해가 지나간다고. 차가운 공기 속에 섞인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시간의 흐름을 더욱 실감 나게 하고, 고운 단풍들은 가을의 끝자락을 더욱 깊고 진하게 물들인다.
우리 부부는 용인 '자작나무 숲'을 찾았다. 가을의 정취가 한껏 묻어나는 곳에서, 마치 세상 모든 시간들이 우리를 잊은 채 지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잘 가꾸어 놓은 산책로를 거닐며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되새기며 손을 맞잡는다.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는 말로 서로를 격려한다.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어떤 순간도 의미가 깊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솔솔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타고 붉고 노란 단풍잎들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볍게 내려앉는다. 그 장면을 보며,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우리의 삶의 가을도 이렇게 아름답기를, 남은 여생을 이 아름다운 가을처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마음도 이 자작나무 숲처럼 단단하고 고요하게,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져 가기를 기도한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핑크뮬리 정원이 펼쳐진다. 그 부드러운 색감은 사랑의 속삭임처럼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그저 흔한 꽃이 아니라 자연이 선물한 아름다운 시, 바람이 만들어낸 예술작품 같다.
핑크뮬리 정원을 카메라에 담는데 온실 정원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뜻밖의 보너스다.
얼른 들어가 자리 잡는다. 산책하던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연주를 준비하는 단원들의 모습이 생경하다.
연주 시작하기 전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소개를 한다. '쿰 오케스트라'로 장애 청소년들로 꾸려졌단다.
그들의 연주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들의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베토벤의 선율은 놀랍도록 우아하고 깊이 있다. '지적 장애'라는 레이블이 전혀 그들의 능력을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느
낀다. 그들의 연주는 편견을 깨뜨리고, 한 편의 서사처럼 내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 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자식의 연주를 지켜보는 엄마들의 모습은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깊고, 아름다웠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걱정과 초조함, 그리고 끝없는 사랑이 묻어 있었다. 한 음 한 음 잘 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내 아이가 잘 해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엄마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마음 깊이 존경과 연민이 일었다.
그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삶과 마음의 이야기를 전하는 언어였다. 부모는 아이의 부족함을 걱정하고, 아이는 그 걱정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려 했다. 그들의 음표 속에서 나는 사랑과 희망, 그리고 함께하는 힘을 느꼈다
연주가 끝나자 나는 앙코르를 목청껏 외쳤다. 많이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고 특히 지휘자를 비롯한 선생님들께 감사했다. 지적 장애우들에게 악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사랑과 인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나는 며칠 전 경기 아트홀에서 열린 '반 클라이번 위너스 콘서트'에 다녀왔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드미트로 초니'와 '안나 게뉴시네'의 피아노 연주회였다. 지난번 반클라이번 콩크루에서 우리나라의피아니스트 임윤찬이 1등 했을 때 2,3등 한 피아니스트들이다. 물론 그들의 연주는 완벽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늘 자작나무숲의 작은 음악회가 나에게는 훨씬 감동으로 다가왔다.
뜻밖의 보너스의 여운을 가슴에 새기며 아름다운 카페에 남편과 마주 앉는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늦가을에 정취에 흠뻑 동화되는 지금,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한 지금. 젊은 시절의 무모한 욕심, 헛된 욕망 모두 추억의 강물에 헹구어 낸다. 참 아름다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