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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상혁 Feb 10. 2023

그녀의 이름은, 누나.

1. 일상의 평온함을 바라며.

 누나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대학교 1학년 19살 때였다. 초등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탓으로 나는 미성년자 상태에서 대학생이 됐다. 또래보다 한 살 어리다는 것은 신체적인 조건도 그만큼 덜 발달될 확률이 높았으니, 나는 특히 초등학교 때 매우 왜소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또래 친구들과 비슷한 체격이 됐지만, 대학생이 됐어도 여전히 마르고 야위어 보였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교에 입학하고 원하는 학과를 전공하면 나는 무척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수업 시간표를 짜면서 내가 생각하는 ‘대학생’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져갔다.


 대학교 수업 시간표라는 것이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간표는 ‘수학’ 과목만 없지 ‘국어’, ‘작문’, ‘교양 영어(독해)’, ‘실용 영어(회화)’ ‘제2외국어’, ‘동양의 지혜(즉, 한문), ‘국문학의 이해’, ‘국어학의 이해’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그리고 과제는 쏟아졌다. 3월, 입학한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그야말로 폭탄처럼 터지는 과제를 해내야 했다.

 ‘교양 영어’는 매시간 영어 단어 쪽지 시험을 봤고, ‘실용 영어’는 미국인 강사가 매시간 영어로 수강생들 모두에게 질문을 했으며, ‘동양의 지혜’는 누가 걸릴지 모르는 긴장의 시간 속에서 교수님께 지명을 받으면 읽기도 어려운 긴 한문을 술술 읽고 해석해 내야 했다. 시켰을 때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면 교수님이 성인인 대학생들을 혼내지야 않았지만, 교수님의 싸늘한 눈빛과 강의실의 쌩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야 했기 때문에, 나와 내 동기들 대부분은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그러니 가뜩이나 마른 내가 더 야윌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이게 뭐야……”        

  

 나는 학교에 오고 가며 그런 말을 숱하게 뱉어냈을 것이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소설 한 편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싶었다. 그렇게 짜증과 울화가 쌓여가는 날들에 그녀, ‘누나’를 만났다. 누나라고 하면 나보다 한두 살 많은 ‘누나’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말하는 누나는 나보다 20살이 많은 누나, 그러니까 그 당시 누나의 나이는 39살쯤 됐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젊은 나이인데 그때는 중년처럼 느껴지는 나이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나보다 한참 어른인 사람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특권 같이 느껴져 나는 누나를 ‘누나’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무척 좋았다. 무엇보다 빨리 나이가 들어 어른 행세를 하고 싶었던 그 시절의 나에게, 진짜 어른인 누나와 일상의 이야기들을 무람없이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누나를 처음 만난 곳은, 소설가를 꿈꾸던 사람들이 모인 ‘소설 모임’에서였다. 나는 19살이었고 누나는 39살이었을 그때, 나이를 넘어 우리의 꿈은 같았고 꿈이 같은 만큼 서로가 지향하는 세상에 대한 희망도 비슷했을 것이다. 소설 공부를 하면서 우리는「인간과 사랑,「정의와 평화,「현재와 미래」의 연장선에 있는 수많은 주제를 토론했고, 그 토론에서 문득 언급된 장소로 다 같이 훌쩍 여행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수없이 많은 ‘밥’을 함께 먹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서로의 좋은 기운을 나눠 갖는 것이니 우리는 짧은 시간에 금세 친해졌다.      


 소설가를 꿈꾸며 만났던 우리는 소설과 더불어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당시 누나를 포함해 ‘소설 모임’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훗날 ‘나의 상상’과 만나 한 편의「소설」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여성 화자를 서술자로 했을 때, 모임에서 내가 ‘누나’로 부르는 여성들이 들려주는 '여성 심리' 이야기는 실제 내 소설 창작에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됐다. 확실한 건 그때 만나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온 모임의 '누나들'이 없었다면, 나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거나 더 늦게 등단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먹은 밥만큼 술잔을 나눈 날은 더 많았고, 그러다 보면 각자 가슴에 품고 있던 꿈에 대한 이야기까지 가 닿을 때가 있었다. 나는 앞으로 이뤄야 할 꿈을, 누나는 그동안 이루지 못한 꿈을 이야기했고 그러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은 복잡다단했을 것이다. 누나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에는 혹 자신이 소설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이 19살짜리 어린애가 이뤄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은 눈빛이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온전히 내 착각일지도 모르나, 나는 누나의 눈빛에서 그런 기대를 읽어냈다. 나는 19살이었지만 누나는 날 항상 어른으로 대해줬고 그로 인해 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군대에 가기 얼마 전인 2000년 즈음이었다. 나는 그때 21살이었고 여전히 마르고 야윈 몸이었다. 그나마 매주 등산을 다닌 덕분에 체력이 조금씩 붙기 시작했을 즈음 만날 약속이 있어 누나를 만났고, 누나가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따라나선 적이 있었다. 누나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소 갈빗집이었다. ‘소설 모임’이 있던 날이었는지 아니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누나가 몰던 자동차에 누나와 나를 포함해 3명이 있었고, 사방이 밝은 상태에서 서울을 출발했는데 소 갈빗집에 도착했을 때는 사위가 컴컴했던 걸 기억한다. 고기를 먹으러 이렇게 멀리까지 올 필요가 있나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냥 고기를 사주나 보다 했지만, 그냥 고기가 아니었다.


 가게 벽에 걸려있는 메뉴판에 소고기 가격이 적혀 있었는데, 기본 1인분에 32,000원부터 시작하는 곳이었다. 당시가 2000년이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얼마나 비싼 고깃집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32,000원이라면 3인분을 시키면 96,000원이 되고 혹 고기가 모자라 1인분을 더 시키거나 공깃밥이나 음료수 등 부수적인 것을 시키면 10만 원이 그냥 넘어가는, 그야말로 '고급 소 갈빗집'이었던 것이다. 나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누나를 건너다봤고, 누나는 괜찮으니 걱정 말고 많이 먹으라고 했다. 나는 거듭 이렇게 비싼 고기를 사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했지만, 누나는 이 정도 사줄 수 있으니 많이 먹고 튼튼해져서 군대 잘 다녀오라고 웃으며 이야기했었다.     


 소고기 맛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하던 내가, 고기가 입안에서 녹아내릴 수도 있다는 경험을 처음으로 한 날이기도 했다. 이날 먹었던 고기 맛을 다시 느껴본 것은, 그 뒤로 10여 년 정도 지나 내가 일본 고베 여행에서 먹어본 ‘일본 흑우(和牛-와규)’에서였다. 그런 고급 소고기가 아니면 맛볼 수 없던 맛이었기 때문에 누나가 사준 소고기는 내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는 맛이 됐다.     


 소고기는 정말 맛있었지만 내 마음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게 소고기를 사주는 당시 누나의 형편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나는 실질적으로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아직 먹이고 입혀야 할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둘이나 있었다. 여자 몸으로 혼자서 사내아이 둘을 키우며 먹고살아야 하니, 학습지 교사부터 시작해 누나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은 안 하는 것 없이 하고 있었을 때였고, 그런 어려운 시기에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만났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내게 아들들에게나 사줄 소고기를 사준다는 것은, 누나 나름대로 큰마음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나에 대한 신뢰와 존중 그리고 아끼는 마음이 없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2023년 지금, 누나는 질곡 많은 삶을 건너 변함없이 내 곁에 있다. 누나는 소설과는 멀어졌으나, 세밀화 그림을 그리는 예술인이 됐고 인사동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뜨거운 여름의 더위를 뚫고 나는 꽃다발을 사 들고 누나 전시회에 가서 누나가 온 정성을 다해 촘촘하게 그려낸, 살아있는 듯한 꽃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작은 그림 하나를 샀다. 사실은 제일 큰 액자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을 사고 싶었으나, 그만한 돈이 내게 없을뿐더러 누나가 전시한 그림 4점은 내가 산 그림을 포함해 이미 모두 팔린 상태였다.

 나는 '지인 할인'이 된 파격적인 세일가로 누나 그림을 샀고, 그 그림은 지금 내 작업실 컴퓨터 모니터 바로 위에 걸려있다. 아마도 누나는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번잡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붓을 들고 몇 시간이나 캠퍼스 앞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쓰다가 문득 누나 그림을 올려다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세밀화 그리기에 고도로 집중하고 있는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 획 한 획 선을 이어가며 그림에 품었을 진심 어린 누나의 마음들이 고스란히 내게 느껴지기도 했다.         


 누나는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 밥을 사준다. 내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영종도에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람처럼 전화해서 ‘상혁아, 밥 먹자, 누나 지금 간다.’라며 전화를 하고 를 몰고 올 때가 있다. 누나에게 받은 ‘선한 영향력’으로 인해 나도 ‘베푸는 마음’의 깊고 넓은 감동을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됐다.    

    

 마음씨만큼 절세미인급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

 60이 넘은 그녀가 50으로도 안 보이는 것은, 타인의 삶의 무게와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 믿는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그녀에게 짧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평온하게 사는 건, 우리의 운명이 아닌 듯한데 그래도 우리는 끊임없이 평온해지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엄마로서 또 여자로서 강철 같은 누나의 삶을 저는 진심으로 존경해요. 예전부터 꼭 한 번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늦은 감이 있네요. 존경하는 00 누나, 앞으로 누나가 선택하는 삶은, 누나의 처음과 끝이 모두 ‘웃음’으로 이루어지는 날들이 기를 바라고 기도할게요.”          


 예전에는 누나의 배려심을 존중하고 좋아했다. 지금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건너, 두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워내 장가를 보내고 손주를 얻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발로 뛰며 생활 전선에 최선을 다하는 누나를 존경한다고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기는 쉬우나 '존경'까지 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나도 내가 지금까지 만나 인연을 이룬 모든 사람들 중에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 꼽는다.           


 나의 10대와 20대, 30대와 40대를 모두 바라본 누나,     

 그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모든 것이 좋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많은 것이 좋았던 것은 분명하다. 때로는 누나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평온해지는 마음일 때도 많았다.


강철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녀,          

그녀의 이름은,     

누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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