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혁 Dec 19. 2022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하루키 소설의 특징들, 그리고 그것들 모두 가진 책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특징을 꼽자면 이렇다.


우물, 새(대체로 부엉이), 고양이, 숲, 컬트와 같이 매번 등장하는 요소가 있고,

음악, 문학, 예술뿐 아니라 모든 클래식한 것에 대한 하루키의 해박한 지식과 관심이 묻어나며,

대체로 주인공은 세상에 별 관심이 없는 시니컬한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매정하거나 쌀쌀맞은 성격은 아니며,

등장인물은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경우가 많고 그 집안은 유서 깊고 부동산을 통해 꾸준히 어렵지 않게 수입을 벌어들인다.

물론 하루키 소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섹스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도 빠지지 않는다.


주로 등장하는 요소와 인물을 보다 보면 이렇게 반복되는 것들이 있고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요소를 새로운 소설에서 찾게 되는 일이 꽤나 반가운 일이 되기도 한다. 마치 작가의 숨겨놓은 심볼을 독자인 내가 찾아낸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요소나 인물 외에도 하루키 소설은 커다란 특징을 또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비유적인 세계관이다. 하루키 소설에는 대개 현실세계에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그 현상은 현실세계에 있는 사건과 인물에 대해 모종의 비유적인 암시를 준다. 그리고 그 암시는 현실이 아닌 비유적 세계, 이데아의 세계, 메타포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연결된다. 대개 현실과 비유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장치로 아까 이야기한 '우물'이 작동하기도 한다. 우물을 통해 비유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주인공도 모르게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흘러간다. 하루키 소설이 항상 미스터리 한 요소를 품고 있고, 긴장감을 주고, 판타지적인 면을 갖게 되는 것은 언제나 이런 비유적 세계가 소설 속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하루키 소설의 특징을 어쩌면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소설이 바로 '기사단장 죽이기'가 아닐까 싶다. 내용을 미리 알리긴 싫어서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기사단장 죽이기는 현실세계와 이데아의 세계가 메타포로서 이어져있고, 우물이 그 두 세계를 이어주며, 고양이도, 숲도, 컬트도, 부동산으로 넉넉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친구도 모두 등장한다. 주인공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일희일비하지 않는 시니컬한 성격을 가졌고 그림을 그리며 음악은 LP판으로 오페라를 듣는다. 클래식적인 요소가 주인공이 듣는 음악이나 미술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구조에서도 드러나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다. 하루키는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번역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한 하루키의 지대한 관심은 이 소설 속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구조를 발견하게 만들기도 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봤다면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아무튼 그래서 내게는 기사단장 죽이기가 하루키 소설 중에 그의 세계관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대중성으로 치면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와 같은 책이 더 많이 팔리기도 했고 대표작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상실의 시대는 하루키가 쓰는 장편소설로 치면 약간 짧기도 하고, 초기에 하루키가 단편으로 썼던 내용을 길게 늘여서 쓴 작품이라 그의 세계관이 잡힌 상태에서 쓰인 책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문체와 상실의 시대에서 드러나는 쓸쓸한 감정, 사랑의 감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자극했던 것이지 하루키적인 요소가 물씬 풍겨 나는 느낌은 아니라고 할까.


사실 1Q84도 하루키적인 요소가 완전히 드러나는 책이다. 어떻게 보면 기사단장 죽이기보다 더 진하게 그의 소설이 갖는 특징이 묻어 나오기도 한다. 일단 제목에서부터 그의 클래식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그런데 1Q84는 하루키 소설을 진득하게 읽던 사람이 아니라면 조금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 대체로 그의 소설이 긴 편이지만 1Q84는 좀 더 그렇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를 읽고 하루키의 문체나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세련된 쓸쓸함의 감정에 이끌려서 그의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먼저 기사단장 죽이기를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세계관에 익숙해졌다면 그 뒤에 진득하게 1Q84를 읽어보기를, 그러다 보면 그의 소설이 갖는 재미와 신비로움에 빠져들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긴 감상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