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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NA PINK May 10. 2022

낮술

오후반차쓰고




# 마치 운명처럼

벌써 3년 전 일이다.

아들을 재운 후 재미있는 TV를 보며 신랑과 야식에 맥주를 마시는 게 우리 부부의 작은 행복이다. 그날 본 TV 프로그램은 오래된 음식점이나 가계들을 찾아 방문하는 ' 노포 래퍼 '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여의도에 위치한 조그마한 바 ' 다희 '에는 우리나라 최장수 바텐더 ' 가 있었다. 바텐더 겸 주인장 한 분과 5명이 앉을 수 있는 바 테이블 1개, 2인용 테이블 1개가 끝이다. 안주는 멸치와 땅콩 그리고 김. 칵테일 종류 총 27가지.  한 잔당 5천 원의 저렴한 가격. 세상 스웨그 넘치게 쉐이킹을 하며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모습에 홀린 듯 ' 저기 너무 가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가계를 검색했더니, 원래도 소문난 곳인데 방송을 타면서 더욱 방문자가 많아지는 바람에 6시부터 대기를 해야 한다고 한다. 한 후기에는 모르는 사람들끼리 어깨동무를 하며 ' We're the world '를 떼창하게 되는 매력이 있는 장소라고 쓰여 있었다. 그 말에 나는 결심했다.

' 당장 가자! '





# 간다면 가야지

같이 갈 사람을 모집하기에는 일단 바 크기가 작았고, 웨이팅을 하며 기다릴 자신은 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웨이팅을 의식하며 급하게 칵테일을 마시는 건 왠지 저 바에서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 오후 반차 ' 밖에 없었다. 신랑도 모르게 혼자 계획한, 이름하여 ' 혼자 낮술 먹기 프로젝트 '.


태어나서 처음 하는 혼술을 낮술로 하다니 :-)   그날은 날씨도 아주 화창한 봄날이었다. 두근두근 떨렸다. 오픈 시간이 4시라 회사에서 일찍 나와 근처 여의도 잡지 박물관에서 신나게 잡지를 보다가 4시에 딱 맞춰 도착했다. 가게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아무도 없겠지 하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70대 노신사 한 분과 대학생 3명이 이미 바 테이블에 앉아있다. 좌석은 중간 남은 자리 1개. 입구에서 다소 머뭇거리자, TV에 나왔던 바텐더님께서 " 어서 오세요~ 처음인가요? 앉으세요 "  하고 남은 한자리를 가리킨다. 퇴근 전 " 오늘 낮술을 마실 거야! "라고 당차게 나왔던 내 모습과는 다르게 그만 소심해져 " 네... " 하고 자리에 앉았다.  





# 2만원에 얻은 지혜

무심한 듯 시크하게 조그만 접시에 멸치와 땅콩을 넉넉하게 담아주었다. " 어떤 걸로 드릴까요? " 하며 코팅된 메뉴판 하나를 건넸다. ' 아.. 어떤 걸로 하지? ' 하고 고민하자. " 첫 잔은 진토닉으로 하죠 " 하시기에 " 네. 그걸로 주세요 "라고 말했다.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시원하게 메뉴를 결정해 주셔서 다행이었다. 방송 보고 왔다는 나의 말에 주인장은 방송에서 받은 목걸이를 꺼내 보여 주신다.  목걸이 하나에 옆 테이블 대학생 3명도 말을 거든다. 여자 1명 남자 2명인 공대생 친구들도 방송을 보고 오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왼쪽에 앉은 70대 노신사분은 40년 지기 단골로 지금은 퇴직한 교수셨다.


칵테일을 3잔쯤 마셨을 때, 알딸딸한 취기를 빌려 옆자리 노신사 분께 질문했다.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가요? "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단번에

" 난 진정성이라고 생각해요 "  라고 답해 주었다.     

진실하고 참된 성질. 진정성. 당시에는 약간 의외의 대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왜 그 노신사분이 그 오래된 바에서 ' 진정성 '을 말했는지 지금에서야 알 것 같다.





여의도. 금융가의 중심. 화려하고 고급스러움을 자랑하는 수많은 바 들 사이에서 40년을 꿋꿋하게 버텼다. 그냥 묵묵히 칵테일 하나만을 만들었다. 화려한 안주도 없이 멸치와 땅콩, 김 만 내었다. 메뉴를 추가하거나, 가계를 확장치도 않았다. 그저 본인의 색 그대로를 지켰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빛바래고 변질될 때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은은한 가치가 될 것이다. 방송 신문 TV 와 같은 매스미디어가 지고 소셜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며, 시장은 더 세분화되고 좁아진다. 브랜드 고유의 가치와 색이 더욱더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 Where is Mine?

" 한자리에서 37년을 어떻게 일하셨어요? 연중무휴로 일하시면 너무 힘드실 거 같아요 "

" 아하하하! 안 힘들어.. 가게 나오는 게 나한테는 즐거운 일인데 뭐, 나를 잊지 않고 해외에서 나한테 보내준 것들 좀 봐. 내가 쉴 수 있나 "


주인장의 뒤편으로 세계 각국의 지폐와 해외에서 보낸 여러 장의 사진과 장식물들이 놓여 있다. 그걸 가리키며  당당하게 웃으시던 최장수 바텐더 분의 웃음이 사진처럼 ' 찰칵 ' 찍혀 내 가슴에 남는다.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진정성은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는 요즘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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