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칼국수 칼국수 노래를 부르는 나에게 신랑이 칼국수를 사주겠노라 한다. 맛있는 칼국수를 먹고 저녁 찬거리를 사러 근처 야채 가계에 들렀다. 미나리, 상추, 깻잎, 소시지를 골라, 신랑은 계산대에 줄을 서고 아들과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가계가 크지 않아 밖이라고 해도 신랑과 나의 거리는 고작 2미터가 안됐다.
" 위생봉투 하나만 주세요 "
신랑이 말했다. 계산원 뒤쪽으로 포장되어 있지 않은 야채류를 감싸기 위한 위생봉투가 한 뭉치 걸려 있었다.
" ..... "
대답이 없다. 안 들렸나 싶어 신랑이 한 번 더 말했다.
" 저기요, 위생봉투 하나만 주세요 "
그러자 낮고 단호하게, 짜증 난 목소리의 계산원이 말했다.
" 안돼요. "
꿈틀..
뭐가 문젠지 신랑에게 물어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 미나리에서 물이 떨어져서 그래요 "
아! 그 이유였다. 나는 장바구니를 길바닥에다가 두어도, 냄새나는 국물이 흘러도 상관없는 사람인 반면,깔끔한 성격의 신랑은 물건을 한 번 더 감싸기 위해 속 비닐이 필요했던 거다.
" 안된다고.. "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었던 나는 계산원을 올려다봤다. 대략 20살 남짓의 남자 계산원. 그리고 그 앞에서 허술하게 포장된 미나리를 들고 있는 우리 신랑 마흔넷.
탁! 이성의 끈이 풀렸다.
" 뭐야? 왜 반말해? "
계산원에게 카드를 뺏어 들면서 신랑 손을 잡고 말했다
" 여보. 신경 쓰지 마, 가자! "
나오면서도 분에 안 풀려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 여기 내가 다신 오나 봐라! "
아들이 말한다. " 아빠한테 반말했어요? "
아뿔싸. 아이가 있었다. 아이 앞에서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른답게 굴었어야 했는데. 이미 저질러진 일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 뭐야!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분노는 아이에게도 전염됐다.
" 잠깐! 화내는 것보다 빨리 잊는 게 더 중요한 거야. 우리 더 이상 이 이야기하지 말자 " 하고 애써 화제를 돌렸지만, 아이 앞에서의 부끄러운 내 모습과 후회는 찝찝한 마음으로 남아 휘익 휘익 내 마음을 휘저었다.
# 급발진의 이유
그날 저녁, 친구와 술 한 잔하고 온 신랑이 말했다.
" 우리 와이프, 이제 밖에다 내놔도 되겠어. 가자! 신랑. 하는데 아주 든든하더라고. "
응? 이건 또 뭔 소린가. 마치 우리 신랑은 (고전) 드라마 ' 파리의 연인 '에서 박신양이 김정은의 손목을 끌며 말한 ' 애기야 가자! ' 같은 느낌을 받은 듯했다. ' 다시 돌아가면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겨우 결론지었는데, 신랑은 자신의 편이 되어준 내가 은근 고마웠나 보다.
사실 나는 누군가의 면전에 대놓고 하고 싶은 쓴소리를 쏟아 낼 위인이 못된다. 쓴소리가 다 뭔가, 윤여정이나 이효리처럼 ' 불편해 나 이런 거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없어서, COOL 내 나는 사람들을 워너비로 삼고 있는 그저 소심한 1인일 뿐이다. 만약 동일한 상황에 내가 놓이게 되었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서서 두고두고 되씹고 분노했을 것이다.그런데, 내가 단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 급발진 '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신랑이니깐' 이었다. 엄마나, 아빠나, 내 아이처럼 나의 가족이니깐. 내가 그 꼴을 겪는 것보다, 가족이 그 꼴을 겪는 건 못 참으니깐. 그래서 그랬다.
# 여전히 답을 내지 못했다
낮에 있었던 일을 이제 겨우 쓰레기통에 던졌는데, 술 취한 신랑 덕분에 다시 스멀스멀 되살아 난다.
연애, 결혼, 출산, 인생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결정 앞에 쓰이는 '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라는 말에 나는 대부분 해야 한다에 손을 들어 주는 편이다. 그런데, 아직도' 무례한 사람에게 똑같이 무례하게 굴어도 될 것인가? '의 답만큼은 명확하게 내지 못하고 있다.
무례한 인간에게 똑같이 무례하게 대처하는 것은 마치 ' 나는 절대 안 해! '라고 했었던 가치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 난 후, ' 니가 했기 때문에 나도 그런 거야 '라고 내로남불식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도인처럼 ' 그러려니 ' 하는 경지에는 턱 없이 모자란 인성을 가진 나는 그저 끙끙 앓는다.똑같이 무례한 반응을 한 후 기분을 망치거나, 벙어리 냉가슴처럼 끙끙 앓거나 선택지는 단 2가지. 둘 다 해 본 1인으로서 뭐가 더 나은 방법인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 나는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이 가장 최상의 답변인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덜 성숙한 어른으로 교통사고처럼 마주친 예측불허의 순간에 어느 것을 해도 후회가 남는 2가지 선택 중 고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냥 끄응. 끄응. 끄응이 여러 번 누적되다 ' 더는 못 참아 ' 식의 펑! 이 터져 버리는 식.
# 비겁하다 욕하지마 (feat. 캔)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뭐가 최선일지를 놓고 한참을 혼자 고민하다. 달력을 보고 기껏 낸 결론.
아... 이틀 전이네. 내가 예민한 이유가 있었네
그렇게 호르몬 탓이라고 의미 없는 결론을 짓는다.
아마 꽤 오랜 시간 나는 또 끄응. 끄응. 앓다가,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져 버리고는 ' 이건 호르몬 탓이야 ' 하는 비겁한 변명 뒤에 숨어 버리기를 선택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