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자 이사를 가도 찾고 싶은 장소가 있다. 바로 우리 동네 레트로 목욕탕 ' 금강산 사우나 ' 다. 레트로라는 부제를 붙였듯 이곳은 탕 내 시설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오래된 신발장 키가 있고 바가지로 툭툭 쳐서 온/냉수를 조절해야 하는 레트로 수도꼭지까지,이곳 에서만큼은 시간이 영영 박제된 것 같다. 도서관을 오며 가며 보기만 하다 한번 가볼까? 하며 반신반의로 찾았던 곳이 이런 보석 같은 곳 일 줄이야.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목욕탕 전체를 가득 메운 쑥 향기이다. 이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는 ' 쑥 사우나 ' 가 있다. 다른 목욕탕에서는 습식 사우나를 기계식 증기를 이용하여 만드는데 비해 이곳은 직접 쑥물을 보글보글 끓여 증기를 만들어 낸다. 쑥 향기 자체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차분해지는데 마치 아로마 테라피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시설도 시설이지만 이곳은 정겨운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다. 고작 주말에 몇 번 찾아오는 정도인데,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먼저 알아봐 주시고 인사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다. 손님들도 서로 먼저랄 것 없이 오며 가며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요즘은 참 보기 드문 풍경이다.
# 거절할 수 없는 호의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종종 부담스러운 호의를 받기도 하는데, 주로 엄마와 비슷한 연령의 60대 분들이 등을 밀어 주시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혼자서 등을 미는 기괴한 포즈가 딱해 보였거나 혹은 자신의 딸의 모습이 투영 되어 그런 제안을 하시지 않나 나름 추측해 본다. 의례 내 등을 맡기면 남의 등도 밀어 줘야 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기에 마냥 괜찮다고 고사하면 실례가 될지 몰라. 나는 주로" 저는 다 밀었고요. 제가 밀어 드릴게요 "수를 쓰는 편이다. 아직 내 등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날은 목욕탕 청소를 하시는 70대 할머니가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내 쪽으로 걸어오셨다. 확신에 찬 발걸음을 애써 부정하며 설마 하는 나의 생각과 다르게 들린 목소리.
" 등 밀어 줄게요 "
앞서 말한 ' 저는 밀었으니~'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할머니는 옷을 입고 계셨기 때문이다.
" 아, 괜찮습니... "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내 타월은 이미 할머니 손에 있다. 아 괜찮은데요 라고 입으로는 말하고 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손길이다. 얼마나 시원한지 속으로 할머니는 필시 세신사 셨던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손길이 지나간 자리자리마다 감탄이 새어 나왔다.
" 그래 결혼은 했고? "
" 네 "
" 아고 그렇구나. 애는 있고? "
" 네 10살짜리 아들이 한 명 있어요 "
" 아들이 제법 크네. 내 막냇동생이 지금 55살이야.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애 키우면 시간 가는 줄 모르거든 "
그렇게 할머니 뻘 되시는 분께 등을 내맡긴 죄스러운 마음에 이제 괜찮다고 말씀드리면 엄마처럼 ' 그대로 있으라고 ' 엄포하셨다. 등미는 것도 금액이 따로 있는지라 돈을 드리고 싶었으나 현금이 없어, 감사한 마음에 사 왔던 음료수를 건넸다. 몇 번 거절하시던 할머니께서는 음료를 받으시고 잘 먹겠다는 인사를 남긴 채 쿨하게 퇴장하셨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시간.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 그 와중에 시원한 등. 이 모든 게 뒤섞여 묘하게 말랑하고 이상한 기분으로 한참을 정지해 있었다.
내가 이 목욕탕을 다시금 찾게 되는 이유는 결국 나의 어린 시절 추억 때문인 것 같다.
미미인형을 정성스레 목욕시키고, 탕에서 물장구 치며 놀던 어린날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이곳. 자연스럽게 서로의 등을 내맡기던 그때 그시절로 시간이 멈춘 듯한 이 곳을 나는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