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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NA PINK Apr 19. 2022

행복에 대한 단상

캄보디아에서




나는 그날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캄보디아 출장 3일차,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 톤레삽 호수 ' 관광 일정이 있었다. 배를 타고 톤레삽 호수 주변의 수상가옥과 학교 등을 지나다 잠시 멈춰 있을 때였다. 관광객들의 이동코스를 잘 알고 있던 톤레삽 호숫가의 주민은 기다렸다는 듯 작은 배를 타고 와  바나나와 과일 등을 팔기 시작했다. 그때 웃으며 말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해 돌아 보자, 철로 된  큰 대야를 배처럼 타고 있는 3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노도 따로 없었다 두 명은 플라스틱 컵과 막대를 한 명은 나뭇가지를 들고 몸을 연신 앞뒤 좌우로 흔들며  대야 위에서 중심을 잡았다. 그 아이들이 온 이유는 관광객들에게 구걸을 하기 위해서였다. ' 까르르르 ' 웃으면서도 ' 원 달러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과일 파는 상인을 보던 사람들이 반대편의 아이들을 보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다. 

 


나는 행여나 아이들이 물에 빠질까 걱정이 되었다. 호수가 넓은 만큼 깊이도 아이 키의 4배 이상은 될 만큼 깊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우려와는 달리 집도 학교도 상점도 모두 물 위에 있는 아이들인지라 수영도 수준급으로 잘했다. 중심을 잘못 잡으면 철 대야에 물이 들어차는데, 물이 너무 들어차면 퍼내기보다는 대야를 뒤집는 편이 빨랐다.  망설임도 없이 물 안으로 풍덩 들어가 철 대야 속 물을 비우고는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대야 위를 올라탄다. 물이 들어가지 않게 철 대야에 순식간에 올라타는 것도 대단한 기술이었다.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구걸했고 배 위의 사람들은 모두 염려했다. 상반되는 이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지던 찰나,  한 아이가 대야를 빙글 하고 돌리자 나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듯한 충격을 느꼈다. 아이의 한쪽 팔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어깨 보다 약간 내려온 지점부터 없었다. 아이는 한쪽 손으로 노를 저으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여느 아이들과 똑같은 티끌 없이 맑은 미소였다. 


  

잠시 잠깐 아이들의 행복을 판단하려 한 나의 오만함과 교만함에 낯 부끄러워졌다. 내가 저 아이들 보다 더 잘 사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아니면 내가 저들 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사니까? 저 아이들은 구걸을 하고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저 아이들이 나보다 행복하지 않다고 감히 생각했던 걸까.. 감히? 

그때 나는 어슴푸레 나의 관점과 기준대로 남의 행복을 마음껏 재단하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라는 책에서 작가는 남의 행복을 우리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샴쌍둥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예시를 들었다. 행복의 강도가 1 ~ 10까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일반인은 샴쌍둥이의 행복 지수를 6 정도로 판단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일반인처럼 오롯이 1인으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완전한 자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달려 본적도 없고, 각자 생각한 적도 없고, 신체도 자유롭게 사용해 본 적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근거를 댄다. 샴쌍둥이가 아무리 ' 우리는 행복해요. 분리 수술이 가능하다고 해도 우리는 이대로가 좋아요 '라고 말을 한들, 일반인들은 ' 그건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고 그들의 생각을 반박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역으로 말한다. 겪어 본 적 없는 것은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 또한 둘이 한 몸으로 살아 본 적 없으면서 왜 그들의 행복은 ' 6 '이라고 보고 우리의 행복은 ' 10 '이라는 논리를 펼치냐는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나보다 못 사니까  나보다 못 가졌기 때문에 나보다 행복하지 않을 거야.라는 논리로 얼마나 많은 실례를 저질렀나?  내 멋대 저울질로 감정을 이입하고 연민에 빠지고 급기야 마음속으로 그들을 동정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수요 없는 공급이다. 톤레삽 소년을 본 그날 이후로 감히 나는 남의 인생에 무례하게 침범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상대방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행복의 총량을 나는 절대로 측정할 수 없다. 그러니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 불행을 공유하고 공감한다는 위험한 발상은 하지 말자. 

  


 각자에겐 각자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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