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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NA PINK May 24. 2022

이기적일 필요성

민감한 내감정을 위한




# 7살 주언이 그리고 나

" 내가 먼저 놀고 있었거든! "

이제 좀 커피 마시고 수다 떠나 했더니 몇 분을 못 넘기고 장난감을 가지고 싸운다. 어린이집에서 일러준 규칙대로 '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 '라고 주장하고 있는 내 아들이 눈에 보인다.

" 아들. 여긴 주언이 누나네 집이잖아. 여기 있는 장난감은 전부 주언이 누나 거야. 그러니깐 주언이 누나가 아끼는 장난감은 주언이 누나한테 물어보고 가지고 놀아야 되는 거야 "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기의 물건을 누군가와 나눠본 적 없는 외동들이라 ' 양보 '라는 것에 서툰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환기 시킬 다른 장난감이나 놀잇거리, 혹은 간식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조곤조곤 아이를 설득하는 친구가 보였다. 내가 ' 아니 그럴 필요 없데도~ '라고 손사래 치며 말려도 결국 주언이를 설득하여 우리 아들 손에 장난감을 쥐여준다. ' 아.. 그건 아닌데 ' 하면서도 친구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우리 아들을 잠시 불러 " 이거 주언이 누나가 양보해 줬으니깐, 누나한테 고맙다고 하고, 5분만 가지고 놀다가 누나 주자 "라고 이야기할 뿐.


원치 않은 양보를 강요당한 주언이를 슬쩍 살피니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도 오로지 우리 아들에게 양보한 그 장난감에 시선을 못 떼고 있다.    


그 순간 내 모습과 주언이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내 것 챙기기 보다 양보의 미덕을 강조했던 부모님, 남의 집 자식 자랑에 마음이 쓰라리면서도 정작 자기 자식 자랑은 어디에서도 안 하는 부모님,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일평생 희생과 양보가 몸에 배어 버린 착한 사람이 우리 부모님이셨다.

언제나 예의를 차리고 본인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내 친구의 모습과 꼭 닮았다.     




#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도려내고 싶었다

어렸을 적 양보와 희생이 착한 마음이라고 배운 아이는 강요된 이타심에 짓눌려 컸다. 당연히 지켜야 할 내 것마저도 어쩔 때는 ' 욕심 ' 이었고 ' 이기심 ' 이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나는 공감 능력까지 뛰어나 남들 눈치, 남들 감정을 살피는 데에 능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아이가 이타심을 강조하는 착한 부모님을 만났으니, 그 속에서 내 것 챙기기는 물건을 훔쳐 간 도둑에게 ' 제발 내 것 좀 돌려주세요 ' 하고 사정하는 일과 같았다.


희생을 강요하는 착한 마음이 냉혹한 사회생활에 얼마나 많은 걸림돌이 되는지, 그 프레임을 알아채고 벗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겪어본 1인으로써, ' 제발 그만해 '라고 친구를 말리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에 달랑달랑 걸려 온종일 묵직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공감 능력을 넘어 감정이입이 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의 감정이 너무 쉽게 전염되어 쉬이 우울해졌다. 슬픈 영화를 보거나, 슬픈 사연을 접하거나, 또는 잔인한 영화를 볼 때에도 찜찜한 기분이 오래갔다. 지인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할 때는 필요 이상으로 슬퍼했고, 극대노 할 사연을 들으면 내 일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고 흥분했다. 내 감정은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쉬이 빨아들였다.


처음에는 나처럼 생각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상대에게 상처받는 말을 내뱉고는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상처받는 말을 듣고 미세하게 다운된 상대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어떻게 상대의 감정을 알아챌 수 없는지가 너무 신기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일일이 남의 감정도 배려치 않는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씌우자. 오래 알고 지냈던 동창, 회사 동료, 대학 선배까지 점차 그 숫자가 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아.. 이건 내 문제구나 '라는 걸 느꼈다.




# 더는 휘둘리지 않겠어

후하고 불으면 꺼져버릴 듯 일렁이는 촛불처럼 작은 바람에도 일렁대는 내 마음이 싫었다. 나는 왜 감정이입이 심해 늘 피곤하게 살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걸 해결하는 방법으로 내 감정이 쉬이 동요될 만한 것들은 일부러 보지 않기로 했다. 이를테면 나는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더 자극적이고 더 강력하고 더 강하게 쏟아 내는 기사에 내 감정을 허비하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부족한 경제 상식은 라디오 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


그리고 ' 내 것 ' 챙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남에게서 묻어온 감정의 찌꺼기들은 ' 남의 것 '이라고 철저하게 규정한다.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일어나는 감정은 내 것이니  좋은 감정은 챙기고 혼탁한 감정은 정화하지만, 공감이라는 말에 묻어 나온 ' 남의 것 ' 은 내 것과 희석되지 않게 솎아 내야 한다.


어떤 날은 내 감정만으로도 충분히 지치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는 아예 내 감정의 문에 빗장을 걸어 잠가야 한다. 내 감정이 모두 소화되고 정화될 때까지는 어떠한 ' 남의 것 '은 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내 감정이 건강하다.


21세기에 중요하게 요구되는 능력은 감성지능과 공감 능력이라는 말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 공감 능력 ' ' 내 것 '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 남의 것 ' 만 챙긴다면 차라리 ' 이기적인 사람 ' 이 되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공감 능력은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능력이다. 적잖은 사회경험 후 느낀 점은 센스와 눈치는 배운다고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야 할 상황과 그러지 말아야 될 상황, 말을 해야 될 상황과 아닌 상황, 그리고 적당한 말을 고르는 능력의 바탕에는 늘 공감 능력이 있다.


만약, 당신도 나와 같이 공감 능력을 넘어 감정이입에 능하다면 지금부터 ' 내 것 ' 과 ' 남의 것 '을 철저히 구분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감정을 구분하고 내 감정의 문을 여닫을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 공감 능력 ' 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은 소시오패스나 사이코 패스가 아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니 우리 슬기롭게 공감 능력을 사용했으면 한다. 남의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내 감정을 철저히 편애하는 이기적일 필요성을 연습해야 한다.  당신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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