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 이 나라에 멋스럽게 어울리는 사람은 몇 없으니 사실상 대한민국 남성들 대부분은 면도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매일 아침 또는 며칠에 한번 꼭 해줘야 하는 면도는 별의별 문제를 유발한다.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안 한 것만도 못한 면도 하나 제대로 못하는 놈이 돼버린다. 날 또한 관리에 소홀해진다면 금세 입가는 트러블 투성이다. 전기면도기를 쓰자니 매끈하게 깎이지 않는 듯하고, 말 그대로 전기 '면도기'라고 피부에 좋으랴. 아무리 쉐이빙 제품이 좋고, 면도기에 절삭력이 우수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서슬 퍼런 날붙이를 입가에 들이미는 짓은 피부에 자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제대로 된 피부 자해 아니 면도를 하더라도 안타깝지만 내일이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난 면도를 사랑한다.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컵을 식간에 비우며 면도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서걱서걱 수염 깎이는 느낌을 좋아하는 페티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깔끔한 내 모습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면도는 나에겐 성스러운 행위이자. 오늘 하루 수많은 유혹을 찢어발길 칼날을 가는 짓이다. 기어코 오늘도 찾아와 준 하루를 예열하는 짓이다.
면도는 쉽지 않다. 급해선 안된다. 마치 깊은 산속 숲냄새를 뱃속 가득 담을 때처럼 의식적으로 그리고 세심하게 지켜보고 돌보아야 한다.
첫 순서는 면도기 날붙이 주변 윤활 젤이 잘 풀어지도록 적당히 따뜻한 물에 면도날을 담근 채로 씻기 시작한다. 세수를 깨끗이 끝냈다면 수건으로 물기를 적당량 없애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당이다. 어느 정도의 물기를 남겨둬야만 한다. 그리고는 쉐이빙폼을 500원 동전크기만큼 짠다. 빳빳한 수염들이 갓 태어난 강아지 털이라 생각하며 쉐이빙폼을 묻힌 손가락들로 포근히 꼭꼭 감싸준다. 거친 세상 속에서 자라난 수염덩어리들이 부드러워지길 3분 정도 기다린다. 담긴 면도기를 가져와 아래 입술 밑부터 면도를 시작한다. 면도는 초속 3CM로 아주 천천히 적당히 밀착되게 시작한다. 스걱스걱 깎여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 면도가 제대로 되지 않는 다면 오늘 하루는 망할 거야 같은 자체 저주를 걸어보기도 한다. 하루 동안 내게 붙어있던 (내일 다시 또 자랄 거지만) 녀석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뭔가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다. 아래턱들에 있는 것들을 다 삭제시키고 나서야 제일 연약한 피부인 윗입술 면도를 시행한다. 트러블이 자주 생기는 곳이기에 가장 나중에 불려지길 바라며 면도를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이제껏 날붙이들이 지나왔던 곳들을 어리숙한 곳이 없었나 만져보고는 턱을 추켜세우기도, 볼을 부풀리기도, 인중을 있는 힘껏 내리며 전보다 더 느린 속도로 역방향으로. 천천히 천천히 천히 기어코 달라붙어있던 녀석들을 내 곁에서 떠나보낸다. 적당한 미지근한 물로 공격당한 내 입가를 진정시켜 주고는, 애프터 쉐이브를 새끼손톱만큼 짜 구석구석 천천히 발라준다. 느슨한 칼춤 췄던 날붙이를 물에 잘 헹구고는 행여 세균이 번식할라 분무기에 담긴 소독용 에탄올을 뿌려주면 된다.
면도를 하며 오늘 하루동안 내가 지켜나가야 할 것들, 유혹에서 이겨내야 할 것들을 되새김질한다.
흡사 전투에 나서기 전 자신의 칼을 가는 장수와 다를 바가 없다. 두꺼운 이불 안에서 호사스럽게 밤새 잠든 나를 부릅뜨게 하는 성스러운 하루의 시작이다. 수염들이 듣는다면 콧방귀를 뀌겠지만 매일 자라나는 녀석은 사실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자라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매끈해진 턱 주변을 만지다 보면, 도저히 턱수염이란 것을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이젠 이렇게 면도가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이가 되었구나 싶은 마음에 비장함을 한 꺼풀 더 껴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