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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림 May 31. 2024

거대한 슬픔에 맞서

피붙이의 죽음이 주는 슬픔의 깊이는 다를 수 있어도 그것은 누구나 가지는 생물학적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친형이 암투병으로 20대에 죽었을 때 이 젊은 영혼은 그저 다음의 인생행로를 가던 길 그대로 이어갈 수가 없었다. 털썩 주저앉아있을 수도 있었지만 다른  삶의 행로를 탐색했다. 깊은 슬픔의 파도가 들이닥쳤을 때 도저히 관성처럼 제법 잘 나가는 뉴요커로서 살 수 없었던 것이다.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페트릭 브링잉 지음, 김희정 조현주 옮김, P.32


아마도 이때 청년의 슬픔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러셀 크로우)가 정적에 의해 처자식이 무참히 도륙당하고 자신은 노예시장의 검투사로 떠돌며 멍하게 하늘을 응시하던 그 눈빛을 닮았으리라.


형의 죽음 이후 잡지 <뉴요커>의 기자 생활을 접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갔던 것은 학예사나 머리를 지독히 써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장승처럼 서서 있는 일이 대부분이었던 경비원 일이었다. 뻥 뚫린 가슴을 안고 그냥 서 있는 것만이 그렇게 살가운 정을 나눈 피붙이의 죽음이 가져다준 슬픔을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슬픈 장승은 시간이 흐르면서 관람객과 소통하는 여유가 생기고 전시관을 옮기며 그림을 응시하며 단상을 기록해 두는 여유도 생겼다. 모네의 그림을 보고는 어떤 미술사학자보다 아름답게 그 느낌을 술회한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산들바람이 중요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 같은 책, P. 117

  

AI 시대, 기계 인간도 형식적으로는 그저 서 있는 일만 하지 않고 움직이고 교감할 수 있다. 입력된 데이터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여러 각도로 재생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과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인간의 감정조차도 아주 근사하게 흉내 내는 기계는 점점 더 정교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간은 점점 더 빨라지는 것이 인류가 걸어왔던 길이기도 하다.  


아마도 궁극의 기술이 부딪히는 한계는 전류가 흐르는 기계와 피가 흐르는 인간의 차이는 깊은 감정을 느끼고 따뜻한 체온으로 상대를 대하는 방식이 아닐까. 무엇보다 깊은 슬픔의 심연에서 길어낸 문장은 기계 인간이 쉬이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메트미술관의 경비원은 생각의 스위치를 끄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해 기계가 쉬이 대체할 수도 있을법한 단순한 일에 지원했지만, 내면의 아주 복잡한 감정을 멋진 글로 승화할 수 있었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청년이었다.  


대부3 알파치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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