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사지 않은 책

by 마디


최근 근사한 서점에서 산 책을 읽다 그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책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작년 말 우연히 본 한 문장 때문이었다. “12월에는 흥청망청 놀고 마시며 한껏 들떠보기도 하고 내 안으로 깊이 잠겨 가장 밑바닥까지 가라앉아보기도 하자.” 12월에 만나 더 극적으로 다가온 문장이기도 했지만, 지나고 다시 보니 비단 12월에만 해당되는 문장은 아닌 것 같다. 흥청망청 매달 놀 순 없는 노릇이지만.... 뭐든 맞닥뜨린 순간 깊이 빠져들어 보자는 말인 것 같아 괜히 용기가 샘솟는다.


취향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된 오 년 전쯤이 떠오른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마이너한 음악과 예술을 접하는 것에 굉장한 흥미가 생겼다. 그런 걸 듣고 향유하는 내가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소위 말하는 ‘나만 알고 싶은 노래’의 표본이었다. "난 탑 100은 잘 안 들어~"라고 말하며 특출난 사람이 된 것 같은 오류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내 마음을 뒤흔들 노래가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폼생폼사에 취해 절호의 기회를 쉽게도 내쳤다.


멋있어 보이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멋있어 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지금 구미가 당기는 음악을 듣고, 음식을 먹고, 갈 수 있다면 그곳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놀랍게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이걸 이제서야 깨달은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다. 나의 좋음을 곧바로 알아채 주는 것을 이제서야 하기로 했다니. 사실 가장 멋있는 건, 좋음을 바로 낚아채는 능력이다. 스스로에게 언제나 솔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생각해 보니 그 책이 좋다고 느낀 그 순간에도 책을 바로 사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책 한 권 살 땐 이리저리 따지면서 퇴근하고 야식은 왜 아무렇지 않게 사먹는 건데... 12월에 이 책을 읽었다면 뭔가가 좀 달라졌을까? 정말 흥청망청 놀고 마시며 한껏 들떠보기도 하다가 내 안으로 깊이 잠겨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드라마틱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제야의 종소리를 듣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확실한 건, 이 작가를 더 빨리 좋아하게 됐을 것이고, 이 책처럼 재치 있는 문장과 구성진 흐름의 이야기를 닮은 글을 한 편이라도 써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게 훅 다가온 순간을 잡았다면 싱싱하게 파닥거리는 활어 같은 감각을 제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카페로 가는 길엔 문득 한로로의 <사랑하게 될 거야> 멜로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체없이 음악 앱을 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길거리에서, 카페에서, 유튜브에서, 릴스에서 너무 많이 들려와 이미 익숙한 노래지만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보니 새삼 달랐다. 새삼 좋았다.


아 뭐가 그리 샘이 났길래

그토록 휘몰아쳤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될 거야


머릿속엔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도 모르는 미끼를 물고 튀어오를 것이다. 난 그걸 낚아챌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된다. 언제나 잡을 수 있는 낚시대가 손에 들린 기분이다.

준비 완료!


브런치 마디 12월에 사지 않은 책 무단사용금지.jpg *12월에 사지 않은 책은 고선경 시인의 <29.9세>. 첫 문단에 인용된 문장의 출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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