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칙은 아니지?
"부부는 가끔 봐야 잘 산다던데, 매일 그렇게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싸우지 않겠어?"
우리가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시부모님께 말씀드렸을 때 당신들 걱정 말고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고 하실 만큼 시부모님은 쿨하신 분들이시다. 하지만 짐을 캠핑카로 옮기고 여행을 갈 준비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자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비추셨다.
"싸울 것 같았으면 아예 여행 가지도 않아요. 어머니~ 걱정 마세요."라고 안심을 시켜드렸지만 50년 내내 부부사이가 그다지 행복하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계속 우리를 걱정하셨다.
여행은 하고 싶어도 배우자와 함께 매일매일 24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것에 큰 부담과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나 또한 남편이 세계여행을 부르짖을 때 거절의 가장 큰 이유가 "당신 하고 아이들하고 24시간 같이 있으라고? 아마 세계여행 시작도 못하고 싸우고 돌아올지도 몰라. 지금 딱 좋은데 뭐 하고 고생하고 싸워. 됐거든"이라고 잘라 말하곤 했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 나는 먼 타지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남편과 아이들과 자주 싸울 것이라 믿었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인간은 원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에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해도 하루 종일 24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면 싸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여행으로 지치고 힘들땐 작은 일로도 얼마든지 싸움이 일어날수밖에 없다.
하지만 또 코로나가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면서 동시에 코로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삶을 살게 했다. 자가격리, 마스크 필수 착용, 코로나 검사, 거리두기, 줌회의등 모든 것이 달라졌고 낯설었다. 새로운 경험은 불편하고 힘들 때가 많지만 분명 우리가 몰랐던 것을 알게 할 때가 있다. 때문에 일부러 새로운 모험이나 도전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대대적인 삶의 변화는 내 생각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자가격리가 시작되고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은 가운데 남편과 아이들 셋, 그렇게 다섯 명은 모두 말 그대로 집에 갇히게 되었다. 처음엔 2주 격리만으로도 한 걱정이 시작되었다. 삼시세끼 밥 차리는 것부터 해서 하루 종일 남편과 애셋이 집에 있으면 분명 갈등이 생길 것이라 믿었다. 각기 성향이나 취향도 너무 다른 우리는 모두들 성정이 조용하고 유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거기다 코로나라는 재앙 때문에 생기는 불안과 긴장감도 만만치 않았다. 모두의 미래도 불확실했고 남편과 내가 다니던 사업과 직장도 모두 정지상태였다.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 학교는 어떡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은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딱이었다. 스스로에게 거의 세뇌를 하듯이 "지금은 거의 전시나 다름없는 상황이야. 그러니 남편이나 아이들을 향한 기대를 완전히 낮추고 이 시간을 잘 버티자."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격리시간은 나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2주가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고 석 달이 넘어갔다. 삼시세끼 차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남편이 있으니 채소도 미리 씻어주고 고기도 손질해 주고 설거지까지 해주어서 편했다. 마치 주방보조가 한 명 생긴 느낌이었다. 모두에게 시간이 남아돌고 갈 데가 없자 우리는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먹는 걸로 그 지겨운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큰 딸을 마카롱, 추로스, 크림퍼프, 쿠키며 집에서 거의 매일 베이킹을 했다. 집에는 빵집에 온 것같은 버터냄새, 빵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도 질세라 전에는 절대로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손이 많이 가는 한식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햇볕이 기가 막히게 좋은 날 온식구가 앉아서 찹쌀풀을 정성스럽게 한장한장 김에 발라 김부각을 만들어 마당에 말리고, 배추와 무를 사다가 김치를 담그고 아예 생닭을 사다가 후라이드치킨까지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먹고 마시는 것에 집중하는 사이 우리 모두는 확찐자가 되어버렸지만, 우린 큰 갈등이나 문제없이 코로나 위기를 잘 극복했다.
이렇게 코로나 격리시간을 나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역할이 남편이었다. 남편은 전형적인 남성형 인간이 아니다. 그는 요즘말로 하면 '에겐남'에 가깝다. 곰의 탈을 쓴 우렁각시라고나 할까? 좋은 말로 하면 감수성이 풍부하고 꼼꼼하고 다정하고 부지런하다. 나쁜 말로 하면 감정적이고 완벽주의에 통제적이고 잔소리가 많다. 사람의 성격은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할 뿐이다.
그런 그의 섬세하고 부지런한 성향은 격리기간에 육아와 살림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이건 이렇게 해야지. 저건 저렇게 하면 안 돼."라고 무차별 잔소리도 들었지만, 득이 있으면 실도 있는 법. 그 정도는 감수할만했다. 남편 덕분에 집에 엄마가 두 명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었으니 오히려 집은 예전보다 훨씬 더 더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 내가 무슨 요리를 할지 말해주면 미리 장도 봐오고 재료손질도 해주고 설거지까지 후다닥 해버렸다. 원래도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그였는데 직장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으니 날개를 단 셈이었다. 오히려 함께 있어서 훨씬 더 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어? 우리 캠핑카 여행을 가도 생각보다 괜찮겠는데?"라고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고 배려해 주는 사람은 늘 남편이었다. 추운 겨울에 출근하기 전 차가 따뜻해지도록 시동을 걸어주고, 손발이 찬 나에게 늘 핫팩이나 손난로를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바닷가로 놀려갈라치면 피곤해하고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의자며, 파라솔이며, 담요며 바리바리 챙겨가고 외식을 하기 전에 속은 괜찮은지 한식을 먹어야 할지 물어보는 사람도 남편뿐이었다. 그것이 지나쳐서 부탁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은 일까지 벌이는 바람에 싸우기도 했지만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생각해 주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그런 그와 함께 한다면 어딜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가격리 5-6개월 동안 코로나이혼이 급증했고 주변에서도 자신들의 부부관계는 허상이었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오히려 우리의 관계가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20여 년 가까이 서로 신뢰와 헌신이라는 돌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관계가 코로나라는 태풍에도 끄떡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 둘 다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오히려 그럴 때 이기에 서로의 소중함을 더 많이 깨달은 시간이 되기도 했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은 집이라는 건물이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했기에 집이 안전했고 따듯했던 것을 알았다. 그런 그와 함께 한다면 어딜 가든 그곳에서 분명히 안정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이 20년 동안 익숙하고 편안했던 곳을 떠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캠핑카 여행은 생각보다 더 많은 예측불가의 상황이 있었고 그로 인해 둘 다 힘들었다. 남편과 나는 우리 둘 다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의 말 한마디 눈빛하나로 충분히 폭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린 그러지 않았다. 서로를 비난함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서로를 다독이고 위로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길 위에서, 깊은 산속에서 사는 삶에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은 유일한 존재였기에 더 소중히 대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이 무모한 모험가운데에도 살아남은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우린 무슨 일이 생겨도 남편과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확신을 다시 한번 알려준 것이 이 여행이 되었다.
우리 부부가 이렇게 잘 지낼 수 있는 데에는 오랜 노력과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그 비밀을 알고 싶으신 분은 제 브런치북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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