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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맨날 피곤한 거야?

일은 내가 다 하는데

by 원정미

내가 여행을 싫어했던 이유는 여행을 좋아할 수 없는 몸뚱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말하자면 나는 대문자 I이다. 내가 내향형 인간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은 알지 못했다. 남들이 놀러 가자고 하고 친구들이 부르면 거의 거절하지 않고 나갔다. 하지만 나갔다 오면 며칠은 이불속에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 그냥 나는 체력이 없다고만 생각했다.


외향적인 남편과 결혼 초엔 매주 주말 놀러를 다녔다. 30분에서 1시간정도 운전해야 하는 거리를 가기도 하고 며칠씩 짬을 내어 3-6시간 거리를 다녀오기도 했다. 뭐든 한번 했다하면 뽕을 뽑아야하는 그의 성격은 여행도 마치 수학여행처럼 스케줄을 짰다. 남편은 미국 여행을 많이 하지 못한 나를 위한 여행이라 했지만 사실 나는 죽을 맛이었다. 그러다 보니 늘 마지막에 피곤하고 힘들어서 짜증을 냈고 나를 위한 여행은 자주 싸움으로 끝나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남편은 빡빡한 스케줄대신 하루 한두 개로 조절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늘 나에게 의문을 품었다. "내가 짐 챙기고, 내가 운전하고, 내가 짐 들고 내가 다하는데 도대체 넌 왜 피곤한 거야?"라고 묻곤 했다.


나도 그 점이 의문이었다. 남편과 함께 여행을 갈 때 내가 딱히 하는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땐 아이들 용품이나 내 것만 챙기면 되었다. 나머지는 다 남편 몫이었다. 편안하게 운전석에 앉아서 데려다주는 곳에서 구경하고 다시 운전석에 앉아서 오는 게 다 인데도 집에 돌아오거나 혹은 호텔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서 쉬어야 했다. 그런 나를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첫 아이를 낳고 알게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하는 순간 나의 모든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긴장을 하고 있었다. 한시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바깥에서 하루 종일 긴장하고 불안해했다. 아이를 낳고 그 불안감이 훨씬 크게 다가왔을 뿐, 그전에도 나는 나도 모르게 익숙하지 않은 곳에선 늘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Highly Sentivity Person (HSP)에 가깝다. 어렸을 때부터 타인의 눈빛이나 태도 말투에서 감정의 변화를 빨리 알아차렸다. 눈치가 엄청 빨랐다. 겁도 많았고 무서운 영화나 드라마는 아예 보지도 않았다. 남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자극들이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낯선 사람, 시끄러운 소리, 낯선 향기, 새로운 음식 같은 것들이 모두 나에게 불편한 자극이었다. 남편이 운전을 다해도 나는 옆에서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운전을 하지 않아도 차에서 내리면 어깨가 뻐근하고 피곤했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잘 놀라고 익숙지 않은 향신료나 식재료는 늘 거부했다. 억지로 뭔가를 먹으면 늘 배탈로 이어졌다.



남편이랑 깊은 산으로 들어가 하이킹이라도 하면 남편과 막내딸은 다람쥐 마냥 신났다. 남편은 "내가 어릴 때 이런 곳에서 놀았어. 저런 절벽을 막 뛰어다녔다니까! 나는 이런 자연이 너무 좋아."라고 흥분한 채로 말했지만 나는 마치 고슴도치가 잔뜩 가시를 세우듯 늘 경계했다. 어디서 벌이나 곤충이 날아들고 뱀이라도 나올까 봐 주위를 살폈고 작은 낙엽이나 새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나는 그런 자연 속에서 한 번도 편안하다 느낀 적이 없었다. 광활한 자연은 오히려 나에게 공포였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아도 밖에만 나갔다 오면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겁고 힘들었다.


이런 내가 캠핑카를 끌고 미국 대장정의 여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예민한 사람이 성격이 나쁘거나 고쳐야 할 질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상에서 불편한 점은 분명히 있다. 쉽게 지치고 쉽게 예민해지기에 쉽게 짜증이 났다.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미 에너지 소모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 했다. 특히 남편 같은 사람과 살려면 더더욱. 그래서 내 나름의 협상안이 캠핑카 여행이 된 것이다. 나에겐 쉴 수 있는 공간과 음식이 너무 중요했다. 잘 자고 배 아프지 않고 잘 소화시키는 게 나에겐 충전이었다. 아무리 밖에서 에너지를 다 써도 충전만 잘 되면 큰 문제가 없었다. 때문에 캠핑카에 안락한 침실과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부엌이 어쩌면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여행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남편이기도 했다. 남편을 위한 여행이기에 나에게 큰 결심과 용기가 필요했지만 궁극적으로 남편에게도 큰 도전은 마찬가지였다. 나처럼 예민하고 쉽게 지치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바닷가를 가도 일단 앉을 수 있는 의자나 돗자리를 챙겨야 했고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 여분의 담요나 잠바도 챙겨야 했다. 날이 뜨거우면 쉬이 지치니 그늘을 만들어줄 파라솔이나 얼음물을 항상 챙겼다. 늘 그의 손엔 짐이 한가득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그냥 당신 혼자 여행하면 편하잖아. 이런 나를 꼭 데리고 다녀야겠어?"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이 " 그냥 나는 당신이랑 같이 갈 거야.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담요에 둘둘 말아서 지게 짐에 이고 지고 갈 테니까"라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여행을 안 가겠다고 버티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고장도 많았고 난관도 있었고 내 체력의 한계를 느낄 만큼 피곤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캠핑카에서 푹 자고 집밥으로 든든하게 잘 먹으면 충전이 되었다. 어떤 날은 아이들과 뜨거운 햇빛아래서 하루 종일 걷기도 하고 시원한 계곡에 발도 담그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날은 아이들과 남편이 모두 수영장을 가고 캠핑카에서 혼자 쉬면서 책도 보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항상 모든 걸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남편도 아이들도 존중해 준다. 함께 있지만 각자의 성향은 인정해주고 있다. 엄마에겐 혼자만의 시간과 쉴 시간이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의 여행이 아직은 큰 소란 없이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요세미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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