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25. 김현철 [춘천 가는 기차]

25. 청춘의 무덤행 열차표를 살 때

by 밍구


“엄마, 비눗방울 사도 돼?”

대형 할인점에서 우리 가족에게 할당된 물건 장을 보는데 시우가 목록에 없는 비눗방울을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대신 나경이 꺼도 골라서 엄마 카트에 넣어. 우리 집 꺼랑 나눠서 계산하게.”

남편의 카트에는 이미 보드카와 소주, 다양한 세계 맥주와 주스가 가득 차 있어 비눗방울 따위가 들어갈 틈이 없기도 했다. 그중 이제는 러시아 대형 할인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주병의 두꺼비가 나를 반갑게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갈색 대용량 맥주 페트는 결단코 들어올 일이 없으리라. 나는 친한 몇 집이 숙소를 잡아 하룻밤을 자고 올 때면 대학 시절 그 밤들이 떠오르곤 한다.


“희철 선배, 이번 엠티는 율전도 가요?”

MT라는 큰 글자 밑에 처음 보는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종이를 훔쳐보며 선배에게 물었다.

“응, 율전 애들은 처음 보지? 민아 너는 후발대니 선발대니?”

중간고사가 끝나고 명륜과 율전 캠퍼스 모두 합쳐 오케스트라 총 엠티를 간다고 하였다. 대학 캠퍼스가 문과와 이과로 나뉜 바람에 교정에서 이공계열 전공자를 볼 수 없었으나 중앙동아리에 가입한 덕분에 동아리 행사를 통해 율전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처음 보았지만 같은 동아리 이름 아래 만났다는 반가움에 우리는 자신의 파트 악기와 이름을 붙여 말하며 금세 친해졌다. 고 학번 선배들이 인솔했던 새내기 시절 그해 여름 엠티는 새내기만 스무 명이 넘었고, 총인원은 족히 오십 명에 달하는 대규모 엠티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레크레이션 강사가 숨어있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화합의 놀이가 진행되었고, 남자 동기들은 여장도 불사한 채 춤을 추었고, 가족오락관을 연상케 하는 게임이 끊임없이 챕터를 넘기며 밤을 밝혔다. 술이 설지 않은 나는 항상 양주가 나올 때까지 자리도 한 번 뜨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끝을 보았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속이 메슥거려 바깥공기를 쐬고 오겠다며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잠시 나가는 게 엠티의 묘미라는 것을.


“우신, 그건 왜 챙겨요?”

나는 엠티 준비물을 챙기는 선배가 보자기로 벼루를 감싸는 모습에 의아해 물었다.

“우리는 엠티를 세연회라고 불러. 돌아오는 날 아침에 냇가에서 벼루를 씻고 오거든. 세연회 처음인가?”

보자기로 잘 감싼 벼루를 가방에 넣는 그의 등짝이 참 넓고 듬직하다고 생각했다. 우신을 따라 동기, 후배 열 명 남짓한 조촐한 인원이 151번 버스를 타고 우이동으로 향했던 세연회가 나의 유일한 서도회 엠티였던 것 같다. 청춘의 밤은 오케스트라나 서도회나 다를 바 없었지만, 세연회에서는 남자가 여자가 되지도, 방과 방 사이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도, 종이컵을 들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며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다만 술에 흠뻑 취해서야 호가 아닌 이름을 불러주는 선배에게 잠시 우당이 아닌 민아가 되어 술잔을 받았다.

다음 날 꾀죄죄한 몰골로 불어터진 10인분 라면을 먹고 떡진 머리와 퉁퉁 부은 얼굴로 한결 가벼워진 짐가방을 들고 숙소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으로 가는 길, 터벅터벅 앞서 가던 우신은 밤을 보냈어도 가벼워지지 않았던 가방을 우이천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소매를 걷고 졸졸졸 흐르는 우이천에 쭈그리고 앉아 벼루를 닦았다. 한 번도 그리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손바닥으로 네모난 벼루 속 동그란 홈을 닦으니 벼루가 얼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선배들은 왜 이런 의식을 시작하고 지켜나가고 있을까. 방탕했으나 훌륭한 어제를 깨끗이 잘 닦아주라는 의미 혹은 맑고 청명한 기운과 추억을 벼루에 담아 글을 쓰란 뜻일지도.


인상 깊었던 엠티의 마지막 페이지는 2학년 봄날 떠난 강촌 엠티다. 청량리에서 강촌 가는 기차를 탔다. 즐비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모두의 손은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들뜨고 팔랑거리는 부나비 같았다. 늦은 시간 수업이 있던 터라 후발대였던 나는 후배 몇, 친한 동기와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에서 나는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의 파편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길을 잃어 헤맸고, 친구는 남자 후배에게 마음을 빼앗겨 ‘누난 내 여자니까’를 흥얼거렸다. 우리는 함께 전공 과제를 걱정했고, 복수 전공과 교직 이수를 고민했다. 그때의 너와 나, 우리는 이십 대의 표본이었다. 감정도, 사람도, 전공 공부도, 미래도 모든 게 안정되지 않고 덜컹거렸다.

캄캄한 밤, 기차는 때마침 우리를 청춘의 무덤에 내려 주었다.


***


나경아, 너의 대학 시절은 무엇이 펼쳐질까. 네 학번은 38학번 정도가 되려나. 네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만큼이나 어색하고 신기한 숫자 조합이구나. 38학번이라니! 네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의 대학 풍속도는 또 어찌 변해있을지 모르겠다만, 청춘의 설렘과 낭만의 농도가 결코 옅어져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어느 나라에서 무엇을 공부하는 아이로 자라날지 도무지 가늠조차 안 되는 상황에서 네게 ‘강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청춘의 무덤 어때. 강촌에 가는 그날 밤이면 우리는 모두 죽어라 마셨고, 좀비처럼 잠들지 못하고 그날 밤을 배회했어. 강촌, 그냥 듣기만 해도 설레고 아련한 묘비명 아니겠니. 모두가 이유 없이 흥청망청 죽어라 술을 마시던 밤이야. 이유를 굳이 대자면? 대학생이니까! 술을 잘하든 못하든 그냥 그렇게 한없이 취하는 밤에 함께 한데 어우러져 널브러지는 것도 그때만 누릴 수 있었던 일탈이었어.

근데 딸, 날 닮아 너는 술고래일지 몰라. 그래도 네 마음에 드는 오빠가 너무 취했으니 잠깐 걷고 오지 않겠느냐 살며시 물으면 못 이기는 척 일어나서 신발 신고 좀 나가. 복학생 선배의 양주 한잔보다 그 산책이 더 진한 여운을 남길 테니.



Track 25. 김현철 [춘천 가는 기차]

작사·작곡 김현철


조금은 지쳐있었나 봐 쫓기는 듯한 내 생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어보며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행

지난 일이 생각나 차라리 혼자도 좋겠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 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 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가네

그리운 사람


차창 가득 뽀얗게 서린 입김을 닦아내 보니

흘러가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술 한잔 마시고 싶어

저녁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 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가네

그리운 사람 그리운 모습

우~~우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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