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거인과 마주 앉아 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때
“엄마, 저 꼭대기에 있는 책은 뭐야? 나 한 번 봐볼래.”
아들은 여섯 단 높이의 책꽂이 가장 높은 단에 꽂힌 20세기 한국소설 전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저건 엄마 책이야. 엄마 공부하는 책. 그림은 하나도 없어서 시우가 이해 못 해.”
나는 팔을 높이 뻗어 오랜만에 소설 전집에서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골라 뽑았다. 책 표지에는 안과 김과 사내가 선술집 동그란 식탁에 둘러앉아 구운 참새를 기다리는 그림과 『서울, 1964년 겨울』이 쓰여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책 겉면을 한 번 쓸어내린 후 시우에게 책을 건넸다. 아이는 책을 펼쳐 보더니 삽화 하나 없이 빽빽한 소설책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게 도로 내밀었다.
“엄마는 이런 책이 재미있어?”
“응. 그러니까 오십 권이나 되는 이 책을 몽땅 여기까지 끌고 왔지. 시우가 열 살 더 먹으면 읽게 될 거야. 그때 엄마랑 같이 읽자.”
나는 제자리에 다시 꽂으려던 그 책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단편소설을 읽었다.
“왠지 우리 조는 느낌이 좋아. 그냥 잘될 것 같아서 걱정이 없어.”
대학 생활을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던 과제를 다섯 손가락으로 꼽으라 한다면 나는 이 과제를 늘 엄지에 붙인다. 그것은 바로 전공 배정을 받기 위해 새내기가 들어야 하는 필수 교양 수업 중 하나였던 <문학 입문> 과제였다. 수강생 전원이 조를 이루어 현대문학 작품을 발표하고 리포트를 쓰는 게 중간고사 대체였다. 우리는 ‘감수성의 혁명’을 이룬 김승옥 작가를 택했다. 그리고 신촌에 있는 무진기행이라는 작고 오래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작가와의 약속 시각을 삼십 분 앞두고 있었다. 한 시간 전부터 연희동 일대를 정처 없이 헤매던 우리 여섯은 그 거리에서 한 시도 떠난 적 없는 무진기행 카페를 몇 번이고 지나친 끝에 가까스로 발견했다. 검은색으로 된 무진기행, 작은 간판과 창문 너머에 포개어진 바퀴 두 개와 그 사이에 쓸쓸히 타고 있는 촛불 하나. 현재에서 외떨어져 있는 느낌의 공간에 우리는 조심스레 발을 디뎠고, 풍덩한 조끼를 입은 소박한 느낌의 주인장이 우릴 반겨주셨다.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통기타가 눈에 띄었다. 열심히 튜닝을 하던 문학 선배는 노래라도 부를 참인지 목을 가다듬더니 이내 가사도 까먹고 코드도 희미하다며 제자리에 기타를 세워 놓았다. 그러나 내 귓속에는 어느 한 곡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혹시 이 곡을 부르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일 분 일 분 약속 시각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리고 무진기행의 문이 열렸다. 우리와 카페 주인장도 예의를 갖춰 인사하였고, 김승옥 작가와 그의 아내가 함께 우리의 촛불을 밝혔다. 60년대를 대표하는 교과서 작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 나는 손끝이 저릿하고 가슴이 시큰했다. 먼저 김승옥 작가는 선배에게 연습장 한 장을 부탁하였고, 거기에 우리는 순서대로 펜을 돌려가며 이름을 썼다. 일괄적으로 선배가 쓰려고 하자 작가는 각자의 이름을 손수 쓰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름을 쓰고 무엇을 어떻게 질문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작가는 가져온 큰 종이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 그 속에서 당신의 작품 전집과 김승옥 문학의 연구 관련 서적 등 대략 8권 정도를 꺼냈다. 혹시나 이걸 우리에게 주는 건가 싶어 나는 『무진기행』 책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으나 작가는 종이에 교보라는 글씨를 썼다.
“전부 교보에 있는 책들이니 거기서 사라는 뜻이에요.”
모두들 알아듣지 못하고 멀뚱히 쳐다보자 그의 아내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질문지와 그에 관한 논문과 기사 자료만 한 뭉텅이 준비했지 정작 그의 소설책은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도 그 당시 사인북을 받아본 적 없던 나의 무지함에 대한 통탄이 가슴에 남아 있다. 우리의 대화는 필담으로, 그리고 아내의 첨언과 마음의 통역으로 이루어졌다. 질문은 거의 똑소리 나는 조원이 이끌어 나갔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말을 잃어버린 그의 입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그의 손만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삼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작가는 말을 잃었다고 했다. 시대를 뛰어넘는 문장력을 구사하는 작가가 바로 김승옥이었다. 글 쓰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은 사람이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그 참담함에 나는 속이 상해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이 질문을 듣고 연습장에 느리게 적어 내린 그의 답변을. 그 글자 안에는 자신을 빛나게 해 준 언어로 함께 했던 서울대 60학번 ‘문리대 거지떼들’의 치열했던 청춘이 담겨있음을. 그리고 그가 그것을 여전히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작가님의 소설 활동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은사님이나 사건이 있나요?”
-모두가 서로 영향
***
나경아, 네가 살아가며 거인을 만날 일이 적어도 꼭 한 번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거인의 세계가 네가 그토록 바라고 선망하는 곳이라면 금상첨화일 테고. 아직 취학 전인 네게 길라잡이는 오로지 엄마 아빠뿐이지만, 학업이 시작되면 여타 좋은 선생님을 여럿 만나며 멘토도 생기겠지. 그리고 학생의 신분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여러 분야의 훌륭한 인생 선배를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접하게 될 거야. 그중에서도 정말 범접할 수 없는 거인과 가까운 자리에서 눈을 마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날은 소소한 것 하나까지도 절대 놓치지 말고 모든 것을 메모하고 기록하거라. 그 기록이 훗날 네게 정말 좋은 자양분이 될 거란다. 모든 것이 쉽고 빠르게 변해가는 우리네 삶에서 결코 변하지 않을 진리를 얻은 날은 언제고 몇 번을 돌이켜봐도 벅차오르기 마련이거든. 네가 숨결마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가까운 자리에서 거인을 마주하는 날 이 노래를 들어보렴. 엄마의 거인은 멋진 문인이었는데 너의 거인은 어떤 분이 될지 무척 궁금하구나.
Track 22.
김광석 [변해가네] 작사·작곡 김창기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며
그 누가 뭐라 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 했지
그리 길지 않는 나의 인생을
혼자 남겨진 거라 생각하며
누군가 손 내밀며 함께 가자 하여도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고집했지
그러나 너를 알게 된 후
사랑하게 된 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나의 길을 가기보다
너와 머물고만 싶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그리 길지 않는 나의 인생을
혼자 남겨진 거라 생각하며
누군가 손 내밀며 함께 가자 하여도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고집했지
그러나 너를 알게 된 후
사랑하게 된 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나의 길을 가기보다
너와 머물고만 싶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