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술이 술술 넘어갈 때
“엄마, 이거 뭐야? 술이야?”
나경이 부엌의 찻장 문을 양팔로 열어젖히고 가장 밑 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묻는다.
“응. 술이야.”
“이것도 술이야?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다 술이야?”
딸아이는 새삼스레 여러 종류의 술병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묻는다.
“응, 몽땅 술이야. 유리병이라 깨지면 위험하니까 문 닫자, 나경아.”
나는 갑자기 딸아이가 술병을 전부 꺼내려는 심산인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엄마, 왜 내 주스는 하난데 엄마 꺼는 이렇게 많아? 엄마는 욕심쟁이야, 흥!”
딸은 급작스레 거실로 달려나가 소파에 얼굴을 묻고 우는 시늉을 한다.
“이따 산책하고 슈퍼에 가자. 네가 먹고 싶은 주스 엄마가 다 사줄게.”
나는 커다랗고 튼튼한 장바구니를 유모차 가방에 넣었다.
“최진실이 죽었다고?”
최진실이 죽었다. 웃는 모습이 예뻐서 텔레비전에 나오면 채널을 돌릴 수 없었던 여배우가 자신처럼 예쁜 아들과 딸마저 뒤로하고 자살했다. 쉬는 시간에 이 생각지도 못한 연예계 뉴스를 접한 한국 학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향하는 길에 우리는 술을 제법 샀다.
“오늘은 우리 방에서 마실까? 거국적으로 마셔야지, 오늘 같은 날엔.”
양손에 술병이 가득한 비닐봉지를 든 은창이 24시간 꽃집 앞을 지나며 말했다. 투명한 꽃집 쇼윈도 안으로 하얀 국화가 보였더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날이었다.
우랄대 기숙사는 취빠예바(чпаева)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 겹으로 이루어진 두꺼운 철문을 열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오면 조그마한 초소에 경비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기숙사 통행증을 제시하여 신분 확인이 되면 회전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고, 경비초소를 기준으로 양 갈래 길이 나뉘어 있었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왼쪽 동 2층으로 첫 학기는 옆방에 중국인 친구 리광이 살던 복도 끝방이었고, 두 번째 학기에는 옆 방에 스웨덴 친구가 있던 엘리베이터 앞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왼쪽 동은 2층만 외국인 학생이 기숙하였고, 나머지 층은 러시아 학생들이 거주하였다. 마찬가지로 오른쪽 동도 8층만 외국인 학생이 배정받아 기숙하였다. 그러나 오른쪽 동 외국인 학생층으로 올라가려면 7층과 8층 사이 계단 앞 경비초소에서 다시 한 번 기숙사 통행증을 제시해야 했다. 그러한 까닭에 오른쪽 동에서 지내는 친구의 방에 가려면 반드시 통행증을 소지해야 했고, 7층까지만 운행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경비초소를 지나 계단으로만 올라가야 했다. 까다로움에 대한 보상이랄까 오른쪽 동은 같은 기숙사비임에도 불구하고 왼쪽 동보다 방이 더 넓고 깨끗하였으며, 거주하는 외국인 학생들의 국적도 더욱 다채로웠다. 그곳은 기숙사의 펜트하우스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올 때도 경비초소를 지나야 하는 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야심한 시각에는 초소 옆 통행로에 자물쇠를 걸어 통행을 막아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다리 타고 내려가야겠다. 너 때문에 오랜만에 사다리 타고 가보네.”
취빠예바 기숙사 3년 차였던 터줏대감 은창이 자물쇠 걸린 초소문을 보더니 기숙사 건물 밖 비상구로 나를 이끌었다. 슬리퍼 속 엄지발가락을 꿈틀거리며 시월의 깜깜한 밤 공기가 퍽 쌀쌀하다고 느끼는 차에 은창이 내 발치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마치 군부대 막사의 지하벙커를 열듯 바닥에서 어느 손잡이를 들어 올리자 정사각형 문이 들여 올려졌고, 그 네모난 구멍에는 밑으로 이어지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어머, 이게 뭐야?”
구멍 밑을 내려다보던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은창에게 물었다.
“뭐긴 뭐냐 인마, 사다리지. 너 내려올 수 있겠어?”
기숙사 일 층에 있는 헬스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은창은 거뜬하게 사다리를 타고 7층으로 내려가더니 위층의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근데 이 술병 좀 받아줘. 그림이 너무 예뻐서 한국에 가져가려고 챙겨 나온 건데.”
나는 쭈그리고 앉아 자작나무가 그려진 0.7L 술병을 아래층의 그에게 힘겹게 내밀며 말했다.
“야, 내일 또 마실 건데 그냥 거기 냅둬. 내일도 비료즈카(березка:자작나무)로 마시면 되잖아.”
은창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그럼 잠깐만 있어봐. 보드카 조금 남았어. 아깝잖아. 너 약속 지켜. 내일도 이걸로 마셔야 해.”
나는 얼른 병뚜껑을 열어 보드카를 입안에 탈탈 털어 내고 비상구 모서리에 병을 세워뒀다. 그리고 엄지발가락을 꼿꼿이 세우고, 손에 힘을 불끈 쥐어 사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 이미 은창은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다시 하나를 입에 물었다.
“은창아, 그거 무슨 맛이야? 나 그거 딱 한 번만 피워봐도 돼?”
나는 손과 무릎을 탁탁 털고 은창에게 담배를 구걸했다. 은창은 안 들린다는 듯 사다리를 타고 다시 올라가 자작나무 술병을 한 손에 들고 성큼성큼 내려왔다. 새벽인지 밤인지 어제인지 오늘인지 분간할 수 없는 노오란 가을날. 매일 술을 마셔야 했던 이유가 지천인 내게 동갑내기 술동무가 있어서 든든했다. 우랄대 취빠예바 기숙사 7층과 8층 사이 그 사다리, 지금도 야심한 새벽 학생들의 우정과 사랑 긴밀히 연결해주고 있을런가.
***
나경아, 다시 한 번 네게 얘기해야겠다. 술자리의 진정한 추억은 문밖에서 쌓인다는 걸 명심해. 이제 와 고백하건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보낸 일 년의 시간, 엄마는 우표만큼 보드카를 사 날랐고, 엽서만큼 술병의 그림을 사랑했고, 한국에서 편지를 받는 친구만큼 러시아에서 여러 술친구를 사귀었단다. 지금도 슈퍼에서 자작나무 술병을 보면 엄마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장바구니에 담고 말지. 네 아빠는 싸구려 술이니 그건 제발 좀 사지 말라고 하지만, 엄마는 제아무리 고급술이라 한들 그 시절 학생의 푼돈으로 사 먹던 낭만적인 자작나무의 추억을 담아낼 수 없기에 이 보드카를 외면할 수 없단다. 임신과 수유의 연속으로 사 년 정도 술을 못 먹었다가 단유를 성공하고 엄마가 제일 먼저 마셨던 보드카도 단연 비료즈카가 아니겠니?
한 때더라, 밑 빠진 독에 물 채우듯 술잔이 깨질 듯 건배하던 나날이. 학교에서 집이 멀어서 열 시면 막차를 타고 내려가야 했던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아주 원 없이 마셨어. 그런데 어느 날 진탕 마셔서 바닥을 기고 있는 내게 나침반 오빠가 북엇국을 끓여주며 호되게 호통을 쳤어. 내가 너 해장국까지 끓여줘야 하느냐고. 그때 정신이 번쩍 났고, 나는 두 손을 싹싹 빌며 더는 보드카를 일곱 잔 이상 마시지 않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지. 그리고 깨달았어. 자유와 방종은 엄연히 명백하게 다르다는 것을.
Track 29. 바비 킴 (feat. Juvie Train) [한잔 더]
작사 쥬비 트레인 작곡 바비 킴
오늘도 역시 입이 심심해. 한잔 생각에 침이 고이네.
언제나 필름이 끊기지만, 어째든 집은 찾아가니까! Let's Go ~!
첨에는 천천히 한잔씩. 건배해 술잔이 깨질 듯이.
밑빠진 독에 물 채우듯이. 계속해 퍼부어 아침까지.
약해빠진 겁쟁이들 모두 다 덤벼. 상대방이 누구든지 난 상관없어.
남자라면 원샷 남기면 쪽 팔려. 견뎌 낼 수 있다면 한잔 더 한잔 더~
뭘 망설이는데. 어차피 망가지는 건 다 똑같애.
난 자신이 있는 게임에만 레이스를 걸어.
내 앞에 있는 걸들에게 목숨을 걸어.
비틀비틀대는 꼴이 이미 게임 Set! 어떻하니 이제 시작인데.
한잔 더 !! 뭘 망설이는데. 어차피 망가지는 건 다 똑같애.
첨에는 천천히 한잔씩. 건배해 술잔이 깨질 듯이.
밑빠진 독에 물 채우듯이. 계속해 퍼부어 아침까지.
요즘엔 맨 정신에 놀지도 못해. 그래서 난 술에 또 취해.
취해서 차비까지 다 써 나중에 골치 아프게. 에라이 똘아이 같은 Juvie 야~!
아직도 술이 덜깼어. 이런 아이고 내 머리야~!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살아가. 월화수목금토~!
하루쯤 잊자고 마시긴 했지만. 끝내 난 또 구토~!
한잔 더 !! 뭘 망설이는데. 어차피 망가지는 건 다 똑같애.
어차피 망가지는 건 다 똑같애.
어차피 망가지는 건 다 똑같애~~
첨에는 천천히 한잔씩. 건배해 술잔이 깨질 듯이.
밑빠진 독에 물 채우듯이. 계속해 퍼부어 아침까지.
첨에는 천천히 한잔씩. 건배해 술잔이 깨질 듯이.
밑빠진 독에 물 채우듯이. 계속해 퍼부어 아침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