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49. 이적 [걱정말아요 그대]

49. 노을빛이 두 뺨을 적실 때

by 밍구


“엄마, 사진, 사진! 빨리, 빨리!”
아들딸이 화장실로 달려와 세탁기에서 빨래를 빼는 내게 야단법석을 떤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나는 쭈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고 화장실에서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오며 묻는다.
“하늘 색깔이 진짜 예뻐. 사진 찍어야 해. 얼른 베란다로 나가자! 노을은 노래 하나 듣는 사이에 사라진다고 엄마가 말했잖아.”
아들은 벌써 대문을 열어 신발을 신고, 딸아이도 질세라 제 오빠를 따라 하기 바쁘다.
노을 맛집이 문을 열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노을 사진을 찍다가 남편에게 노을이 예뻐서 당신이 보고 싶다고 노을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낸다.


나의 휴대폰 속 연락처를 들여다보면 언니가 무려 쉰 명이 넘는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가 맺는 관계 속에서 언니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열두 명의 친가 친척 중에 여덟 명의 언니를 두고 막내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막내의 기운은 타고나는 것인지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나는 어떤 모임에서든 등치에 걸맞지 않게 시종 막내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남남끼리의 여자들 사이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위인 여자를 높여 정답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 언니. 한 배속에서 태어난 친언니는 없지만, 정답게 부를 수 있는 언니가 인생에서 점점 많아지는 건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인복(人福)이다. 여기서 알게 된 언니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 타역에서 자신이 꾸린 가정이 있다는 점이다. 언니들 대부분은 누군가의 아내뿐만 아니라 엄마이기도 하다. 이 점이 나는 자못 재미있고 신선하다. 결혼식을 올리고 러시아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나는 한국에서의 아줌마 생활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시우가 다섯 살에 유치원을 입학하기 전까지도 한국인이 살지 않는 촌에서 아이를 키웠기에 모스크바에서의 삶은 라멘스코예에서의 삶과는 또 다른 빛깔이다.


내 아이가 함께 어울려 노는 친구와 형, 누나들의 엄마와 나도 친구가 되는 경험은 참 조심스러우면서도 감사하다. 여태껏 살면서 어린아이를 접할 일이 없던 나는 단독적으로 아이 한명 한명을 알아가는 것이 무척 소중하고 감동적이다. 순수한 아이들의 꾸밈없는 얼굴과 행동을 보며 그 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키워내고 있는 그들의 엄마도 함께 이해하게 된다. 더 나아가 요즘 같은 시대에 아이의 친구네 집에 엄마와 동생, 어떤 때에는 아빠까지 함께 건너가 늦은 시간까지 놀 수 있다는 것은 이곳만의 특권인 것 같다. 하지만 이 특권이 자칫 그 선을 넘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관계이든 보이지 않는 적정선을 서로 지켜야 원만하고 쾌적한 관계가 유지된다는 걸 좁은 교민사회에서 더욱 통감하는 바이다.
언니들의 세계는 위태로우면서도 안온하다. 언니들이 자신의 아이를 대하는 양육관과 세계관을 보며 나와 같을 때는 공감하고, 다를 때는 나의 양육관에 대해 돌이켜보고 고민할 수 있어 좋다. 대부분이 육아에 있어 선배인 언니들이기에 많은 부분을 배우고 신세 지며 산다. 물질적, 심리적으로 받기만 하는 상황이 고맙다는 표현에 내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어 답답하고 미안해지는 적도 여러 번이었다. 아이가 아플 때면 남편보다 언니에게 전화하여 아이의 병원도 대개 언니들과 함께 갔다. 아이가 열이 올랐던 다음날이면 너나 할 것 없이 내게 연락하여 하얗게 지새웠던 나의 밤을 토닥여준 것도 언니들이다. 어떤 언니라고 딱히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소중하고 특별한, 내 마음속 무지개 같은 언니들.


언니의 세계에서 유독 노을이 예뻤던 그날은 두 아이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나를 일깨우는 감동을 받았다.
"나 있잖아 네 블로그에서 그 글 보면서 참 많이 위로받았어. 하나둘 불 켜지는 집을 바라보면서 다들 오늘도 각자 집에서 하루를 버텨냈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물이 났어."
모스크바의 락다운이 해제되고 언니들 셋과 우리 집 부엌에서 함께 백야를 함께 보낸 날이었다. 그날은 스무 번째 맥주병을 깔 때쯤에서야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했는데 그때 낭만을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형미 언니가 말했다.
"그래 맞아, 민아야. 글 좀 자주 올려줘. 마치 학창시절 월간잡지 받아보는 기분이야. 육아 퇴근하고 네 글 읽는 게 요즘 내 힐링이야. 언니는 네 글이 길수록 읽을거리가 많아서 막 설렌다고."
무알콜 맥주 두 병에 볼이 발그레해진 민선 언니가 얼른 말을 보탰다.
"내가 표현하지 못하는 순간이나 생각을 네가 흘려보내지 않고 내 일기장처럼 온전히 기록으로 남겨줘서 고마워. 댓글을 일일이 달지 못하지만, 항상 내 마음을 담아 하트는 꾹 눌러. 이제야 고백하지만 난 민아의 찐팬이라우. 자, 우리 강 작가 한 잔해."
나의 빈 잔에 보드카를 채워주며 세인언니가 건배를 제의했다.
한 언니의 갑작스러운 고백이 나머지 두 언니의 고백으로 이어졌고, 나는 술기운 때문인지 뜬금없는 언니들의 사랑 고백 때문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작가로 꿈을 굳히고 따뜻한 글을 쓰는 게 목표이자 바람이었던 나를 잊고 살았다.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지는 감정과 일상이 아쉬워 시작한 블로그였다. 지극히 사적인 글들이 누군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위로가 되고 심지어 기다려진다는 게 신기했다. 어떤 책이든 너의 책이라면 열 권씩 사주겠다는 그녀들의 마음에 배불렀다. 덧붙여 블로그를 통해 이곳에서의 시간을 성글게라도 남겨놓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낭독회나 문학 기행에서 늘 독자의 자리에 앉아있던 내가 그날 밤 우리 집 부엌에서는 세 독자와 함께 한 작가가 된 달뜬 기분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러시아의 하늘은 한국보다 늘 높게 느껴진다. 다채로운 하늘의 빛깔을 탐미하고 그것으로 변화무쌍한 날씨의 찰나를 파악하다 보니 하늘을 하루에도 수십 번 바라보는 게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그런 나에게 지금 사는 집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러브하우스다. 모든 방의 창이 알맞게 크고, 창밖으로 차들이 아닌 나무와 행인이 보이기 때문이다. 창밖 풍경은 늘 나를 위로해준다. 특히 여름날 붉게 타는 저녁놀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건강하게 잘 보낸 내게 자연이 건네는 선물 같다. 반면 옅은 분홍빛이 에메랄드빛 하늘에 섞인 겨울날의 일출은 춥고 어두운 나날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잘 보내라는 응원의 메시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평범하고 뻣뻣한 일상 풍경이 하루 한 번 계절에 따라 해가 지거나 뜰 무렵 멋진 수채화로 탈바꿈하는 찰나를 포착하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다. 이 모든 낭만적 장면이 멀리 있지 않고, 어쩌다 한 번이 아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집순이의 무미건조한 일상에 낭만은 꼭 필요하니까. 그리고 글과 노래와 그림으로 타인의 마음을 어루어만져주는 것만큼 낭만적인 일은 또 없으니까.
나는 긴 겨울잠을 자고 있던 내 마음 속 또라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우리 찐하게 노래 한 번 하자."


***

나경아, 엄마는 너와 네 오빠가 하늘을 읽을 줄 아는 아이로 자라나는 것 같아 감사하구나. 엄마가 이 집을 사랑하는 많은 이유 중 가장 큰 지분은 이 커다란 창에 있다고 흔들림 없이 말할 수 있어. 아마 또다시 이사를 가야 한다면 나는 굉장히 창문에 연연하는 사람이 될 것 같구나. 너와 시우를 임신했을 때 십자수로 러시아풍경을 하나씩 완성하였는데 그때도 나는 노을이 물든 바실리성당과 노보데비치수도원을 골랐지. 태어날 아기와 그런 멋진 풍경을 함께 보고팠던 마음이었지.

딸, 엄마는 네가 학업을 시작하여 엄마에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유화를 배울까 해. 러시아의 석양을 표현해보고 싶거든. 삼분 남짓의 그 짧은 순간 너희와 함께 바라보던 노을빛을 엄마는 이 시절의 색깔로 기억할 거야. 지금의 순간이 차마 힘들다고만 말할 수 없듯 한 가지 색으로 모조리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노을빛처럼. 저 멀리에서 뒤돌아보면 우리의 오늘은 찬란함만 남아 있을 거야. 되돌아볼 수는 있지만, 결코 되돌아올 수는 없는 곳에서 말이지.



Track 49.

이적 [걱정말아요 그대] 작사·작곡 전인권 원곡 전인권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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