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내가 너의 위로를 필요로 할 때
"엄마, 엄마는 나이를 많이 먹었어, 조금 먹었어?"
"엄마는 많이 먹었지. 시우랑 나경이는 조금 먹었고."
"아닌데? 엄마는 나이 많이 안 먹었는데?"
저녁 설거지를 하는 내 옆에 시우가 착 달라붙어 이야기를 한다.
"그래? 엄마가 어려 보여?"
나이를 많이 안 먹었다고 말해주는 아들 녀석의 말 한마디에 주책 맞게 기분이 좋아져서 되묻는다.
"아니. 나랑 나경이는 아까 저녁밥 많이 먹어서 나이도 많이 먹었는데 엄마는 밥 안 먹었잖아. 그러니까 나이도 안 먹었지."
"(매우 실망스러운 어조로) 아, 그래…. 엄마가 깜빡했네. 엄마는 내일 아침밥 많이 먹으면서 나이도 챙겨 먹을게."
말도 안 되게 엉뚱하고 순수한 아이의 발상에 웃음이 나왔다.
"아니야, 나이 많이 먹으면 할머니 되는 거지, 엄마는? 나는 어른이 되는 거고?"
"그렇지, 시우는 밥이랑 나이랑 많이 먹으면 어른 되고, 엄마는 할머니 되고."
"그럼 나는 밥 많이 먹을게, 엄마는 먹지 마. 나 기다렸다가 내가 어른 되면 같이 나이 먹자."
고무장갑을 벗어 아들을 꽉 안을 수밖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엎치락 뒤치락거린 지 일 년이 넘었다. 기세가 등등하였다가 조금 꺾이는 것도 같더니 좀처럼 사라질 생각은 하지 않는 얄궂은 것이 이제 우리 삶 전반에 기저하고 있다. 이러한 시국에 남편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가족을 모두 끌고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당연하였고, 나와 상의 없이 이스탄불을 경유하여 서른 시간을 걸려 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보는 그의 뒷모습이 참을 수 없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위험과 불편함을 감수하여도 발인을 지키기 힘든 비행 일정임에도 얼굴조차 뵌 적 없는 아이들의 진외증조부의 장례를 위해 내 아들, 딸을 데리고 들어가려 하는 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며칠 잠을 설쳤다. 그리고 원망의 화살은 남편이 아닌 내게로 꽂혔다. 내 마음이 시끄러웠던 건 비단 남편의 행동 때문만이 아니라 나의 후회스러운 과거의 잘못된 선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할머니, 저 글씨 오른손으로 쓰는 거 할머니가 고쳐주신 거예요?"
나는 어른이 되어 내 오른손을 앞뒤로 뒤집어보며 할머니에게 물었다.
왼손잡이였던 어린 나를 외할머니댁에 맡기고 엄마와 아빠는 오빠만 데리고 여행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친정에 돌아와 보니 내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있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럼, 학교에 가면 바른손으로 글씨를 써야지 짝꿍을 만들어주지."
할머니는 내 손등을 쓸어 주시며 말씀했다.
"그럼 왜 밥 먹는 건 안 고쳐주셨어요? 밥 먹을 때도 오른손으로 먹으면 안 불편할 텐데."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말라는데 바른손으로 먹으라고 먹는 걸 때릴 수는 없어서 못 고쳐줬지."
할머니는 마저 내 왼손을 만지며 대답해주셨다.
할머니는 신여성이었다. 할머니는 보라색 옷이 참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할머니의 서랍장에는 갖가지 스카프가 즐비했고,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시던 할머니는 사진을 찍을 때면 입 모양을 새초롬하게 앙다물었다. 거동이 불편해지셨어도 꼭 속바지를 챙겨 입으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셨고, 얼굴에 늘어가는 검버섯을 보며 많이 속상해하셨다. 연세를 드실수록 귀는 더욱 밝아지셨고, '제기랄!'이라는 추임새와 말재간은 절대 녹슬지 않았다. 손끝도 야무져서 추운 나라에 가서 사는 손녀딸을 위해서 매번 털모자와 털양말을 짜주셨다.
내가 할머니를 신여성이라 부르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바로 치즈, 그 말도 못하게 똥구렁내가 나는 누우런 치즈 때문이다. 엄마와 네덜란드 여행 중 치즈 마을 알크마르에 갔다가 <톰과 제리>에 나올 법한 커다란 치즈 두 덩이를 사 왔다. 하나는 치즈를 좋아하는 오군 몫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 가족이 먹으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깊은 향취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냉동실 한편에 방치되었던 치즈를, 김장하러 집에 오신 할머니가 맛있다며 글쎄 그 커다란 치즈를 몽땅 해치우신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러시아 마트에서 동그랗고 샛노란 치즈만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나곤 했다.
내가 할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되었다.
할머니는 영종도에서 태어나셨다. 할머니는 그 당시의 관례처럼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셨고, 거센 시집살이로 몇 년간 죽도록 일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외할아버지와 다시 결혼하셨다. 할아버지는 북에 아내와 슬하의 자식 셋을 남겨두고 혼자 전쟁통에 남에 내려와 할머니를 만나셨다. 인텔리였던 할아버지는 남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할아버지는 틈날 때면 다락방에 올라가셔서 당신의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북에 두고 온 처자식과 자신의 청춘을 기록하셨다고 한다. 남에서도 할머니와의 사이에서 똑같이 자식 셋을 두었지만, 할아버지는 늘 그리움에 젖어 지냈다. 어느 날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회고록을 엿보았고, 온통 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애타는 마음뿐임에 분개하셨다. 그리하여 그 두툼한 할아버지의 자서전을 발기발기 찢어버리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할머니가 몹시 미웠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하사받은 문방사우를 내게 물려주신 자상했던 할아버지 편에 서서 나는 할머니를 원망했다. 그리고 실향민으로서 평생을 보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내 고향을 가슴에 묻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이제 '통일'이란 단어가 추상적인 시대가 된 오늘을 살아가는 내 가슴 속에도 꼭 통일은 되어야 한다는 염원이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나는 마음속으로 할머니보다 할아버지를 더 사랑했다.
그랬던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할머니에게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비로소 할머니가 가엾고, 할아버지의 회고록을 들춰보았을 때 느꼈을 할머니의 감정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온전한 나의 인연도 아닌, 그렇다고 반쪽짜리 내 남자조차도 아닌, 빈껍데기 사람과 사는 기분이었을 거라 추측한다면 우리 할머니가 너무 가여워지는 것 같아서 심지어 할아버지한테 화가 났다.
큰 아이 돌잔치를 치르고 러시아로 돌아온 그해 가을이었다. 할머니는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셨고, 한 달 후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곳에서 서서히 기력이 쇠진해지셨고, 그대로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셨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엄마에게 거울을 보여 달라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엄마에게 거울을 밀어주었다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날 전화를 끊고 나 또한 얼마나 울었던가. 보라색 옷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흰 얼굴에 콧대가 높고 턱이 뾰족한 할머니. 비록 육신은 노쇠하였어도 정신은 또렷하던 나의 신여성이 자신의 얼굴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직면한 순간 밀려왔을 절망감이 얼마나 할머니를 외롭게 만들었을까.
결국 할머니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추운 겨울날 영면하셨다.
"지난밤 꿈에 너희 검둥개가 꿈에 나와서 즐겁게 놀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꿈에 그로부터 일 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깜상이가 나왔다고 한다. 엄마 말에 의하면 깜상이가 하늘나라에 간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우리 가족 만큼이나 상심이 크셨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늙어가는 것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까 깜상이와 할머니의 마지막은 서로에게 침잠했던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타국에 산다는 핑계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때는 18개월 아들과 단둘이 비행기를 타고 장례를 치르고 온다는 게 엄두가 안 났다. 출가외인이란 생각에 시댁 눈치가 보인 것도 사실이고, 비행기삯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아무도 내게 당연히 다녀와야지, 라고 말해주지 않았고, 왜 거기에 가느냐는 말 또한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엄마만이 여기는 걱정하지 말라며 오지 말라고 누차 내게 말씀하셨을 뿐이었고, 나는 망설인 끝에 그 말에 어물쩍 묻어 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매우 어리석은 선택이었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남았다. 엄마의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른 체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나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 결국 나는 49재에는 늦지 않게 한국행 비행기에 아들과 단둘이 몸을 실었다.
“시우 어미야, 와줘서 고마웠다. 너희가 있어서 두 달 정신을 쏙 빼먹었지만, 너네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우울증에 걸렸을 거다. 이제는 내가 기운을 차려서 맛있는 밥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떠난다니 너무 아쉽다. 정말 보내기 싫다.”
공항으로 우리를 배웅해주시던 시어머니는 공항 가는 길에서 잠시 헤맸다. 아주 익숙한 길이었음에도 길을 잘못 든 그녀를 보며 복잡한 그녀의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어머니. 저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어머니께 큰 위로가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저희 가고 나서 딱 한 번만 속 시원히 우세요. 저희 때문에 슬퍼할 새도 없으셨잖아요. 저도 어머니 힘들 때 옆에서 위로 해드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는 핸들에 올린 그녀의 두툼한 손에 내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장례는 떠나는 자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겨진 자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도 크다는 것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나는 한 발 늦고 말았지만,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았다.
***
나경아, 어린 시절 엄마의 집 거실 한편에 의젓하게 자리하고 있었다는 금빛 전축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그 전축으로 키다리 할머니는 <타박네>라는 노래를 자주 들으셨어. ‘우리 엄마 젖을 다오’라는 가사가 이제 막 토끼 자수가 앙증맞게 놓인 브래지어를 하기 시작한 내게는 너무 뜨악하여 아직도 기억이 남는구나. 이 노래가 이번 엽서를 쓰는데 불현듯 내 마음속에 튀어나와 계속 맴도는 건 내가 이 노래를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이 노래를 듣던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나와 별 차이 없었으니 말야.
타국살이를 선택하였을 당시에는 러시아와 한국의 왕래가 어렵지 않았기에 나는 호기롭게 짐을 꾸린 것도 있지. 그러나 지금처럼 원하는 때에 언제고 쉽게 오갈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자 나는 겁이 나더구나. 만일의 상황에서 나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게 지금도 참 무섭다. 결혼하고 네 아빠가 처음으로 많이 미웠던 날들이야. 그 감정을 깨트리기가 어려워 나는 더욱 화가 났어. 그런데 오히려 부고를 접하자 그러한 마음이 모두 사라지더구나. 그리고 그는 나와 같은 후회로 얼룩진 선택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그에게 화가 나고 미웠던 감정은 다름 아닌 부러움과 내가 저지른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 그러자 그가 이렇게 모든 불편함과 수고로움을 감내하면서까지 나와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가기로 결단을 내려준 게 진심으로 고마웠어. 그마저 나처럼 행동하였다면 나는 내가 잘못을 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용서도 구하지 않고 지나칠 뻔했거든.
딸아, 먼 훗날 나도 삶의 수순처럼 고아가 되겠지. 난 슬플 거야, 아주 많이. 설령 내가 그때의 키다리 할머니처럼 네게 엄마는 괜찮다고 말해도 곧이듣지 말아줘. 난 네 위로를 많이 받고 싶을 것 같구나.
Track 48.
장필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작사 조동희 작곡 조동익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 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수 많은 겨울들 나를 감싸안던 너의 손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 쯤에 또 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때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줘
널 위한 나의 기억이 이제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힘겨운 어제를 나를 지켜주던 너의 가슴
이렇게 내 맘이 서글퍼 질때면 또 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줘
Hidden track
서유석 [타박네] 양병집 채보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 어드메 울고 가니
우리 엄마 무덤가에 젖먹으로 찾아 간다
물이 깊어서 못간단다 물 깊으면 헤엄치지
산이 높아서 못간단다 산이 높으면 기어 가지
명태줄라 명태 싫다 가지줄라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무덤가에 기어기어 와서 보니
빛깔 곱고 탐스러운 개똥참외 열렸길래
두 손으로 따서들고 정신없이 먹어 보니
우리 엄마 살아 생전 내게 주던 젖맛일세
명태줄라 명태 싫다 가지줄라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명태줄라 명태 싫다 가지줄라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젖을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