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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안한 제이드 Jan 17. 2023

회의자료 취합의 설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취합만 했는데


  공공기관에서 일하면 회의를 참 많이 하게 된다. 회의를 위한 회의, 회의를 위한 회의를 위한 회의... 여하간 보고와 회의는 자가증식이라도 하는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만 가는데, 회의를 할 때는 반드시 '회의자료'가 A4용지로 예쁘게 인쇄되어 책상 위에 있어야 한다. '회의합시다~' 하면 각자의 아이패드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가 자유롭게 토론하는 드라마 속 회의장면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 최소한 A4 1장의 회의자료는 있어야(내용이 없더라도) 시작하는 것이 공공기관의 흔한 회의 풍경이다. 


  그렇다면 그 '회의자료'는 누가 무슨 내용을 넣어서 만들까? 주간 단위로 이루어지는 부서장 정기 회의의 경우, 현안(그때그때 서로 공유해야 하는 이슈) 위주의 회의자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현안은 보통 각 업무 담당자가 업무별로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공공기관의 경우, '취합'을 하는 사람이 양식을 돌려서 각 업무 담당자에게 업무별 현안을 받고, 그걸 분량 안에 들어가도록 잘 정리해서 부서장에게 드린다. 그러면 부서장은 정리된 현안자료를 가지고 부서장 회의에 들어가서 자기 부서의 현안을 윗사람(본부장 등)에게 보고하고 다른 부서 부서장에게 공유한다. 결국 '취합'을 하는 사람이 만든 회의자료가 부서장 회의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취합'을 하는 사람, 줄여 말해 취합자(뭔가 어감이 이상하다)는 누가 될까? 이런 주요한 업무를 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팀원 중 어린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막내를 시키기엔 너무 양심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선임한테 시키기엔 이런 자잘한 일을 시키기 미안하니까, 결국 밑에서 두 번째, 또는 세 번째인 사람이 이 업무를 떠안게 된다. '뭐, 다른 사람들이 내용을 다 써주고 취합해서 정리만 하면 되니까 쉬운 업무니 그냥 해야지' 싶은가?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취합 업무는 열받아서 뚜껑 열리기 딱 좋은 업무이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적어보려 한다. 


사진: UnsplashKOBU Agency



  첫 번째로, 사람들은 절대절대 시간 내에 취합하는 사람에게 자료를 주지 않는다. 만약 월요일 아침에 하는 회의를 위한 회의 자료를 취합한다고 한다면, 정리하고 보고할 시간이 필요하니 아무리 늦어도 금요일 오전까지는 취합이 완료되어야 한다. 취합자는 양식을 만들어 뿌리며 '금요일 오전까지 주세요'라고 이야기한다. 팀원이 다섯 명이라면 두 명은 금요일 오전에 주고, 두 명은 독촉하면 오후에 주며, 나머지 한 명은 이미 취합해서 보고한 뒤에 '아 나 넣을 내용 있었는데~'라고 말할 것이다. 개개인 입장에서는 내가 보고해야 하는 업무가 아니니 뒤로 미루거나 대충 적어서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례들이 모이고 모이면 취합자가 폭발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양식에 맞춰서 보내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공공기관 문서는 양식이 중요하다. 폰트, 글씨크기는 당연하고 심한 경우 자간, 줄 간격도 본다. 이런 것들을 지켜서 작성해 달라고 취합자는 '양식'이라는 걸 만들어서 뿌리지만, 많은 사람들은 양식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작성해서 보낸다. 그러면 취합하는 사람은 양식에 맞추어서 다시 폰트를 조정하고 자간을 조정하고... 그런 걸 하면서 야근하고 있으면 절로 자괴감이 든다. 


  마지막으로, 보고받는 부서장은 취합자가 단순한 취합자임을 잘 잊는다. 취합하는 사람은 A사원이 하는 a업무와 B사원이 하는 b업무의 디테일은 잘 모른다. 그저 A사원과 B사원이 몇 줄 적어서 준 이번 주 a사업과 b사업의 현안을 받아서 양식에 맞게 잘 조정하기만 했을 뿐이다. 물론 정말 업무에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의 경우 자기가 받은 몇 줄의 내용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려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업무의 히스토리나 뒷배경, 향후 예정사항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그걸 아는 것이 이 사람의 업무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오히려 각 사업에 대한 정보는 평소 모든 것을 보고받는 부서장이 자료 취합자보다 더 잘 알아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부서장은 취합된 회의 자료를 보고받고 각 사업에 대해 궁금한 것을 취합자에게 묻는다. 'a사업은 하반기에는 어떻게 진행하기로 했지?' 그러면 취합자는 '아 제가 그럼 A사원에게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A사원에게 달려가 확인해서 다시 보고하고.. 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정말 심한 경우 '그런 부분까지 네가 다 파악해 왔어야지!' 하고 호통치는 부서장도 있다(감동실화). 


  여하간 공공기관에서 회의자료를 취합하는 사람은 위로는 부서장한테 이상한 이유로 혼나고(다른 사람의 업무를 세세히 알지 못한다고 혼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아래로는 사람들이 제시간에 자료를 안 줘서 분노하게 되는, 위아래로 끼어있는 설움 가득한 자리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심지어 업무 하는 티도 안 난다니! 그래서 나는 취합 업무가 싫다. 물론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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