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핵심이 아니라 표현이야
*현실에서 많이 각색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새로운(?) 2024년의 시작. 회사에서의 신년은 연간업무보고의 시즌이라는 말과 같다. 12월부터 시작된 압박감은 1월이 되면 극에 달한다. 작년보다 줄어든 예산을 들고도 올해는 뭔가 또(!) 새로운 것을 새롭게 하는 것처럼 보이게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마법사도 아니고 원.
연간업무보고의 재미있는 점은, 아무도 그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이 특징은 우리 회사에만 해당될 수도 있겠다.) 일단 모든 것이 다 된다고 써야 다른 팀과의 자랑 대결에서 지지 않을 수 있다. 작년에 못했던 일도 하고, 새로운 일도 하고! 물론 하던 일도 계속해야 한다. 사람이 줄고 예산이 줄었어도 진취적이어야 한다. 왜냐? 새해 연간업무보고니까. 연간업무보고는 무릇 뭐든 하겠다는 자신감과 열정으로 가득해야 하는 법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내용을 알차게 담는 것보다 새롭고 있어 보이는 표현을 쓰는 것에 모두가 더 집중한다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행위를 '보고서에 있어빌리티를 더한다'고 말한다. '있어빌리티'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있어bility', 있어 보이는 그 무엇의 명사형 단어이다. 같은 단어라도 더 멋있게, 더 세련된 표현으로 써야 윗분들이 보고 '그렇지 맞아 맞아' 하실 수가 있다.
사진: Unsplash의Annie Spratt
올해 연간업무보고 시기에도 앞에서 언급한 것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정성스럽게(?) 작성한 2024년 업무 계획을 받아본 부서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쓴 내용이 다 맞긴 한데 말이야.. 뭔가 표현이 좀 부족해...' 나는 참지 못하고 대답해 버렸다. '그러니까, 있어빌리티가 부족하다는 뜻이시죠?' 그 이후부터 부서장님과 나의 '누가 누가 더 세련되고 멋진 단어 찾아내나' 대회가 시작되었다. 보고서 내용은 유지하되, 단어들만 '있어 보이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사용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다. '스타트업 용어', '스타트업 단어' 구글링 하기. 우리 기관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회사는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이면서(공공기관이니까) 이상하게 연간업무보고를 쓸 때는 스타트업에서 쓰는 단어들을 좋아한다. 특히 평소에는 한자어를 매우 선호하시는 윗분들에게 뭔가 새롭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안 쓰던 영단어들이 총출동된다. '회의'는 '미팅'이 되고, '협의회'는 '컨퍼런스'가 된다. '애자일', '엑셀러레이션', '문샷 씽킹'... 그냥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모든 영단어들을 다 동원한다고 보면 된다. 너무 우습지만 놀랍게도 연간업무보고 시기에는 이 전략이 꽤나 잘 먹혀들어간다. 윗분들이 못 들어본 특이한 영단어일수록 타율이 높아진다. 나는 실제로 스타트업 다니는 친구한테 요새 핫한 단어가 뭔지 물어보기도 했다(ㅎㅎ). 그렇게 보고서의 내용은 산으로 가지만 '있어빌리티'는 슬슬 생겨나기 시작한다.
폭풍 같은 연간업무보고 시기가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 뻔하다. 다시 원래의 평범한 공공기관 분위기로 돌아간다. '미팅'은 '1차 회의'가 되고, '컨퍼런스'는 '2024년 ㅇㅇ협의회'로 바뀐다. 새로우면서도 새롭지 않은 1년이 그렇게 흘러간다. 그리고 벌써 예상된다. 2024년 12월이 되어 2025년 연간업무계획을 세우기 위해 구글에서 '스타트업 요즘 단어'를 검색하고 있는 내 모습이.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