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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안한 제이드 Nov 25. 2022

술을 마시면 다음날 아침 전사에 소문이 납니다

공공기관의 세계는 좁디좁다


*현실에서 약간 각색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일했던 팀 중에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선후배가 많았던 팀이 있었다. 공공기관 특성상 순환근무로 인해 몇 년 후에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한 선배의 추진으로 종종 저녁자리를 같이하곤 했다(억지로 가는 자리가 아닌, 진심으로 즐겁게 즐기는 자리!). 참석하는 사람들은 다들 떠들어대길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 ㅇㅇ랑 ㅇㅇ랑 술 마시러 간다' 얘기하지도 않았고, 조용히 만나서 조용히 먹고 헤어지는 편에 가까웠다. 그날도 그렇게 회사에서의 열받는 에피소드를 공유하는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고, 그다음 날 출근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팀 차장님과 마주쳤다. 그 차장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ㅇㅇ씨, 어제 늦게까지 마셨다며? 재밌었어?"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비밀이 없는 회사라지만, 어제 저녁자리 뉴스를 대체 다음날 출근시간에 다른 팀 차장님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지금도 사실 그 과정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이 회사에서 소문은 진짜 광속으로 퍼지는구나. 모든 일은 실시간으로 전 직원에 공유되는구나. 




  비단 누가 누구와 저녁을 먹었다더라, 하는 소문만 빨리 퍼지는 건 아니다. 일에 관한 소문도, 그 밖에 자잘한 가십도, 직원들의 개인사도 대부분 며칠 뒤면 전사 직원들이 알고 있다. ㅇㅇ팀에서 어제 팀장하고 ㅇㅇ팀원이 신경전을 벌였다, ㅇㅇ팀 직원이 곧 결혼할 거 같다, ㅇㅇ팀 ㅇㅇ차장이 어제 대전에 출장 다녀왔더라... 모든 이야기는 입에 입을 거치며 때로는 부풀려지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모든 직원들에게 결국은 공유된다는 것이다. 한때 어떻게 이렇게 잘 퍼지는 건지 궁금해서 그 과정을 분석해본 적도 있었는데, 크게 두 가지 경로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공기관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팀이다. 같은 팀에 있으면 하루 종일 같이 앉아있고, 심지어 어떤 팀은 거의 매일 점심도 같이 먹는다. 스몰토크를 나눌 시간이 무한대로 있다는 뜻이다. 이야기할 시간이 있으면 업무 얘기든, 어느 정도 사적인 이야기든 조금은 풀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서로 나누게 된다. 

  두 번째, 기수 네트워크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같은 시기에 채용한 사람들에게 기수를 붙인다(ex:1기, 2기, 3기...). 그리고 같은 기수의 사람들은 동기라 불리며, 같이 신입 교육을 받고 그 이후에도 친하게 지내게 된다. 동기뿐 아니라 위아래 가까운 기수의 선후배와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교류를 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나이나 연차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동기나 가까운 선후배와는 평소 팀에서 하지 못하는 답답한 업무 이야기, 팀 안에서 벌어졌던 재미있는 이야기 등을 잽싸게 나눈다.


Photo by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



  이 두 가지 네트워크가 겹쳐지면 소문은 무한대로 증식한다. A팀에서 a차장과 b사원이 업무 F에 대한 의견 차이로 약간 큰 소리를 내며 다투었다. 그 소리를 해당 팀 및 옆 팀의 팀장과 팀원들이 들었다. 그러면 그날 점심때 그 팀에 있었던 수많은 기수의 팀장&팀원들이 자신의 동기들과 점심을 먹으며 그 소식을 나눈다(오늘 오전에 A팀 a차장님이랑 b사원이 F 때문에 싸웠잖아~). 그러면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오후에 자기 팀으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바로 퍼뜨린다(제가 오늘 점심에 들었는데요, A팀 a차장님이랑 B사원이 싸웠대요~). 그리고 그 팀들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 미처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자기 동기들에게 다시 이야기를 퍼뜨리고.. 의 무한반복이다. 이 반복을 몇 번 겪다 보면 크지 않은 공공기관의 경우 순식간에 전사 직원이 A팀에서 있었던 작은 다툼에 대해 알게 된다. 물론 약간의 왜곡이 생길 수는 있다(업무 F가 아니라 업무 B 때문에 싸웠다고 알려진다던지)..




  나는 회사 내부에서 이렇게 소문이 빨리 퍼지는 게 한때는 너무 스트레스였고, 사실 지금도 좋아하진 않는다. 내가 주말에 뭘 봤는지, 회사 업무 중 뭐 때문에 힘든지, 내년에 이사를 가는지 안 가는지, 내 고향이 어디고 부모님은 지금 어디 사시는지.. 그런 것들을 나는 정말 친한 사람하고만 공유하고 싶은데, 단 한 명에게만 이야기해도 몇 달 지나고 나면 내가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람조차 알고 있는 것을 몇 번 겪으면서 결국은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지금도 회사에서 나는 내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 편은 아니며, 무슨 말을 할 때면 이 사실을 전사 직원이 알아도 되는 것인가? 한 번 더 고민해보고 이야기한다. 반쯤은 이 분위기의 회사에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회사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어떤 선배에 대해 엄청 좋아하고 같이 오래 일하고 싶음을 어필할 필요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절대 선배 본인에게는 안 했지만, 대신 내 주변의 회사 동료 모두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결국! 선배 본인에게도 그 이야기가 들어갈 것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결국 내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해서 그 선배도 내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ㅎㅎ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나쁜 소문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런 조그만 공공기관에서는 나쁜 소문이든 좋은 소문이든 결국 다 공유된다. 그러니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활용해보려 한다. 좋아하는 선배, 후배에 대해서 좋은 말을 더더 많이 하자. 그러면 어느 날인가, 누군가의 나에 대한 좋은 이야기도 돌고 돌아 내게 돌아올 것이라 나는 믿는다(순진한 믿음이라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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