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공공기관의 회의 시간. 팀에는 당장 처리해야 하는 업무 A가 갑자기 생겨난 상황이다. 업무분장이 명확하지 않으니 이 업무 A를 a차장이 해야 할지, b과장이 해야 할지, 아니면 막내인 c사원이 해야 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업무 A는 스스로 빛날 수 있는 업무가 아니라, 굉장히 골치 아픈 단순노동 더하기 일반행정 처리에 가깝다. 공공기관의 팀장님들 중 상당수가 이럴 때 던지는 말이 있다.
공공기관은 그 특성상 부서장(=팀장)도 순환근무를 한다. 한 팀에 2~3년 있으면 으레 다른 팀으로 옮겨지니, 팀원과 마찬가지로 팀장의 전문성도 사기업 대비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도 그렇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손 들어 보라고 하며 '자원'을 바라다니. 듣기에는 '이 고생 누가 할래? 손 들어봐'로 해석되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회사에서는 소위 R&R(Role & Responsibilities)이 중요하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늘 떠돈다. 하지만 공공기관만큼 R&R이 없는 회사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자기가 맡은 역할(Role)이 뭔지 모르고, 그에 비해 책임(Responsibility)은 지나치게 크다고 느낀다.
책임감(Responsibility) 있는 팀장은 업무분장이 애매한 공공기관에서도 어떻게든 팀원들에게 역할(Role)을 부여하려 애쓴다. 팀원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부여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자 책임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책임감(Responsibility) 없는 사람이 부서장 자리에 앉았을 때 발생한다. 이런 사람은 팀장으로서의 권위와 권력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 역할과 책임에는 관심이 없다. 팀원들에게 업무를 나눠주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다. 일이란 건 자고로 팀원들이 알아서 나눠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누가 할지 애매한 업무가 생겼을 때, 팀장인 자신이 할 일은 자애롭게 누가 자원할지 물어보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결국 애매한 업무 A는 책임감이 넘치고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 c사원이 어리둥절한 상태로 받게 된다. 물론 그 일에 대한 책임까지 c사원이 받게 될 것이다. role 없이 responsibility만 가득한 회의 시간이 그렇게 끝난다.
먼 옛날에는 부서장이 팀원들이 한 일에 결재 도장만 찍어주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공공기관의 업무 자체가 지금보다 더 정형화되어 있어서 모든 일이 작년의 복붙만 하면 되는 시절의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그에 맞춰서 공공기관의 업무도 변화무쌍해지면서, 이제 부서장이 팀원의 업무와 책임을(R&R을) 정의하고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되었다.
부디 이 사실을 공공기관의 많은 부서장(팀장)님들이 이제는 받아들여주셨으면 하는 바이다. 더 이상 회의 시간에 땅이 꺼질 것처럼 한숨만 내쉬며 누가누가 먼저 손 들고 이 침묵을 깨 줄까 눈치 보는 건 하고 싶지 않아서, 글로나마 한탄을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