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서로 쇼잉만 하면 진짜 '일'은 누가 하나요
*레드벨벳의 '루키' 가사가 생각나서 써본 제목입니다ㅎ
10월이다. 4분기의 시작. 이제 일을 벌이기보다는 벌였던 일의 결과물을 추수해야 하는 시즌이 되었다. 곧 있을 연말에는 한 해를 정리하는 사업별 결과보고가 이어질 것이고 부서별 평가도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하던 업무를 갈무리하고 결과물을 내야 할 것 같지만, 공공기관의 4분기 모양새가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4분기에 또! 새로운 사업을 찾아 나서고, 신규 기획을 발굴한다. 모든 것은 연말에 벌어질 승진/전보 인사를 위한 상위 직급에의 쇼잉에서 시작된다.
예전에 모 코미디언이 자기는 가을쯤에 시작하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한다고 말하는 걸 봤던 기억이 있다. 모두가 예상하듯 연말 시상식을 노리려면 가을쯤 시청자들&방송 관계자들에게 어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기억력이 제한되는 인간인지라, 연말에 상 줄 사람을 고를 때 연초에 활약했던 사람의 공적은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모든 일은 직전에 하는 것이 좋다.
Photo by Alex Kotliarskyi on Unsplash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주로 연말에 이루어지는 대형 정기 인사를 앞두고, 모든 부서장&팀원들은 똑같은 생각을 한다. '아, 연말에 뭔가가 짜잔~ 하고 나오도록 일을 해야겠다!' 그러면 나머지 1~3분기에는 무엇을 할까?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만 나도록 이런저런 부가적인 일들만 하며 시간을 보낸다. 물론 때마다 해야 하는 일이 정해져 있는 부서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서들은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 닥쳐오는 일들을 처리한다. 루틴한 업무는 지루하고 공이 들지만 티가 안 난다. 야근을 하며 사람을 갈아넣어 실수 없이 문제들을 처리해 나가도 보고자료에는 'ㅇㅇ업무 진행 완료' 한 줄만 들어갈 뿐이다.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윗사람들에게 줄 수가 없다. 4분기가 다가오면 직원&부서장은 초조해진다. 올해 일을 했다는 어필을 위에 하려면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해! 그렇게 4분기에 신규 사업을 발굴하는 무리한 계획이 펼쳐진다.
요령이 없는 나는 변수가 많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연초에 모든 의견수렴과 자료 분석을 마치고 연간 사업계획을 세우면 그걸 위에 보고하고 1년 동안 그대로 운영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내가 세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면, 마치 1년 동안 하는 일만 하는 사원으로 보이게 된다. 윗분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연초에 보고했던 일은 6월쯤 되면 이미 알고 있는, 재미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결국 나를 비롯해 정해진대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반기쯤 되면 눈물을 흘리며 '업무 개선계획'을 짜내고 짜낸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의견을 청취하고(연초에 다 했던 것들), 새로운 회사와 업무협약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윗분들이 만나서 악수하는 사진을 찍는 행사도 기획하면 최고다. 어르신들은 자신이 빛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좋아하니까.
자기가 정말 즐기면서 하든, 나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하든, 결국 4분기쯤 되면 진짜 '일'은 점점 뒤로 밀리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사진을 찍고, 새로운 뭔가를 기획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일들이 일정표를 빼곡히 채우게 된다. 하지만, 그러면 진짜 '일', 당장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누가 언제 하는 걸까? 책임감 있는 사람은 울고 화내면서 야근하며 진짜 '일'을 한다(업무시간엔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그렇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진짜 '일'을 안 한다. 어차피 윗분들이 보고받기 귀찮아하는 진짜 일 따위, 대충 넘겨버리면 그만이다. 수년 후 감사에서 지적받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그때는 (순환근무로 인해) 난 이 업무를 안 할 거니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 일을 하고 있는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일을 열심히 해서 윗분들 눈에 들어 이번에 승진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결국은 다시 순환근무 이야기로 돌아오게 되었다(공공기관의 원죄인가;). 핵심은 지루하고 위에서 보기에 재미없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 많은 공공기관의 특성과 순환근무라는 공공기관 근무의 특성이 만나면서, 책임감 없지만 위에 어필은 잘하는 사람들이 순간순간 보고받기 재미있어하는 일을 기획하고 그 일을 완성하지 않은 채로 도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된다는 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같이 그런 것을 너무 싫어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책임질 수 있어야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상대적으로 새로운 (윗분들 보기에 재미있어보이는) 일을 벌이는 데 소극적이다. 그러면 무슨 얘기를 들을지는 뻔하다. '너는 일에 대해 자신감 있게 진취적으로 하는 모습이 부족하구나'라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나는 공공기관을 n년째 다니고 있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은(사람이라면) 결과를 낼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이 되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진짜 일의 결과는 책임감을 가진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맞다. 이 글도 4분기를 맞이하여 일을 하는 느낌을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은 데 대한 반감으로 쓴 것이다. 부디 이번 4분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일을 벌일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그게 안 되면 정말 폭발해버릴 것 같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