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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코인 세탁소 사건

by 새내기권선생

타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큰 화가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그 일이 ‘여행’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나는 이를 망각한 채 여행의 계획을 착실하게 작성했다. 곧 떠날 여행에 대한 흥분으로, 친구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귀 기울여 들어볼 틈이 없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자, 그저 여행의 기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냥 나 혼자 갈게.”

그날 밤, 우리는 빨래를 해야만 했다. 특가 항공권을 사느라 짐을 더 싣지 못해 몇 가지만의 옷을 돌려 입다 보니 자연스레 세탁을 자주 해야 했다. 나는 당연히 빨랫감들을 정리하며 밖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 10시였다. 새벽 투어까지 마치고 녹초가 된 상태여서 그런지 피곤함과 예민함이 더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여행지에서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빨래방에 가는 건 여행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피곤함을 무릅쓰고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더 늦기 전에 얼른 세탁하러 갔다 올래?”

그러자 친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 너무 귀찮은데…. 내 것까지 가져가서 혼자 다녀오면 안 돼?”

특별히 기분 나쁘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귀찮다'는 말에 김이 팍 새고 말았다. 이국에서 빨래방을 가는 것도 낭만적인 일인데……. 친구의 말을 곱씹을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자기 몫까지 맡기려고 하는 걸 보면 피곤해도 그렇게 피곤한 일일까, 나도 피곤한 건 매한가지인데. 나는 서운함이 앞서서 그냥 나 혼자 가겠다고 중얼거렸다. 나와 친구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같이 가 그럼.”

친구는 조용히 노트북을 챙겼다. 그런 모습이 의아했지만, 이곳에 와서 여행의 기분을 즐기기보다 일을 우선시하려는 모습에 조금은 심술이 났다. 세탁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우리는 툴툴거리며 코인 세탁소로 갔다. 친구는 등받이 없는 좁다란 의자에 앉아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그런 불편한 모습을 계속 보고 있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친구에게 나는 괜찮으니, 숙소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친구는 말없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가 돌아가고 난 후, 건조기의 남은 시간을 보니 1시간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뭘 하지, 싶다가 문득 밤거리나 걷자 싶었다. 물론 타국에서 밤거리를 혼자 걷는다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다. 그렇지만 대만은 우리나라만큼 치안이 안전하다고 들은 바 있으니, 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세탁소의 문을 나섰다.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저 멀리로 꽤 규모 있는 야시장이 보였다. 형형색색의 먹거리들,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게임기들, 웃음 가득한 사람들. 평소 같았으면 그런 풍경들을 세세히 구경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밝게 웃으며 유쾌하게 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쩐지 내 마음 한편을 찔러댔다.

친구 때문인가. 나는 아까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또 온종일 친구와 함께 한 시간을 떠올렸다. 그러자 친구와 긴장감이 팽팽했던 사건의 전말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친구는 마감 기한이 촉박하지만, 꼭 작성해야만 하는 문서가 있다고 했다. 노심초사하면서 노트북을 붙들고 있었다. 심지어 잠들기 전까지 침대 위에서 작업을 하곤 했다. 밤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마친 뒤에는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다음 행선지를 꿈꾸며,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숙소로 들어오자, 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나, 대만 여행이 이렇게 힘들지 몰랐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는 타이베이를 벗어나고부터 조금은 더 여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 때문에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논문을 타이중과 가오슝에서 마무리 지을 거로 생각했다. 반면, 막상 빽빽한 여행 계획 때문에 그가 논문을 완성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는 여행의 즐거움과 논문의 다급함 속에서 온탕과 냉탕을 오고 가고 있었다. 혼자 설렘만 가득한 채 쉴 새 없이 친구를 졸랐던 날들이 스쳐 갔다.


나는 ‘교사’라는,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의 관계에서는 소통에 서투른 방식을 내보였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말만 해왔던 이 사실에서, 아이들이 더 더 나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평소 아이들에게 늘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실천해야 한다고 얘기해 왔건만, 정작 나는 내 처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교사라는 자가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지 못했음에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그러면서도 친구도 용기 있게 일정을 조정해 달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나에게 맞춰주려고 말하지 못했다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나 혼자의 흥에만 빠져 있는 걸 맞춰주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동안 나는 자신이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여겨왔다. 이타적인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배려심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세탁소 사건을 통해 되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속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능력도 부족했다. 친구에게 상처를 준 걸 진심으로 사과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우 잘 안다고 생각한다. 다정하고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적당히 선량한 사람으로. 그렇더라도 낯선 땅에 닿는 순간 우리는 내면 속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

우리는 여행지의 환대만큼이나 타인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급한 논문 마감, 한국에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감정의 선, 여행 중 계속 신경 써야만 하는 이의 동석 등. 처한 상황들마다 우리는 배려를 원한다. 그만큼 우리도 배려를 실천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에 타인의 사정을 1%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다. 서로 물러서지 않고 엇갈리기만 한다면 여행도, 인생 역시 다툼으로 엉망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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