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평소에도 패션에 관심이 많아 어딜 가나 멋쟁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하셨다. 게다가 수영 교실, 노래 교실, 댄스 스포츠 등 남는 시간을 활용해 활발히 외부 활동을 하시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나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80대가 되면서 외출이 귀찮은지 집에만 계시는 날이 많아졌고, 점점 몸이 아프다며 병원을 들락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서서히 삶의 흥미를 잃어가는 모습이었다.
어딜 가도 멋쟁이 소리를 듣던 화려한 귀녀 씨는, 그저 자식들 고생하지 않게 조용히 사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토록 화려했던 할머니가 자꾸만 옷들을 정리하고, "내가 얼마나 더 살겠느냐"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일 때 나는 결심했다. 할머니를 유튜버로 만들겠다고.
그렇게, 가라앉아 있던 귀녀씨를 유튜브의 세계로 끌어들인 건 외손자인 나였다. 나의 눈에 할머니는 항상 반짝이고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한번 해보자, 할머니!"
할머니는 고민이 길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유튜브를 통해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검색해서 들을 줄은 알았으나, 직접 촬영한 영상을 업로드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나는 끊임없이 할머니를 설득했다. 할머니의 능력이 아깝다고, 충분히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내가 다 편집하고 책임질 테니 함께 하기만 해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첫 예고편 영상('42년생 귀녀씨, 유튜버 데뷔하다?!')을 올리며 시작한 게 지난해 2월. 어느덧 1년 반이 지났다. 할머니는 말한다.
"그만하고 싶을 때도 있었죠."
벌써 1년 차 유튜버가 된 이귀녀 씨는 그간 힘들었던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녀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바로 여든이 넘은 나이였다.
"이 나이 먹고 무슨 유튜브를 하냐고, 사람들이 욕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죠. 그래서 그만둘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괜히 혼자서 자꾸만 신경 쓰다 보니 힘들기도 하고, 누가 내 영상을 좋아해 줄까 싶기도 하고요. 구독도 잘 늘지도 않고요(웃음)."
그녀의 콤플렉스 또한 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스물넷의 나이에 시집을 가서 시어머니와 시누이 밑에 지내며 고된 시집살이를 한 탓에 그녀의 곱던 손이 여기저기 울퉁불퉁해졌단다.
"그래서 영상을 촬영할 때도 내가 항상 손은 안 나오게 찍으라고 그러잖아요(웃음). 어렸을 때는 손 예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시집가서 추운 날에도 맨손으로 빨래하고 밥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밖에서는 2교대로 공장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살림하고, 매일 그렇게 살았으니까."
나는 귀녀 씨의 삶을 이제야 조금 알 수 있었다. 할머니와 나를 더 가깝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유튜브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할머니가 언제나 당당하고 멋있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숱한 고생을 이기고 삼 남매를 키워낸 강한 엄마이자 아내였다.
"또 다른 삶이 생긴 것 같아요."
아직 구독자가 300명도 되지 않는 신생 유튜버일 뿐이지만, 귀녀 씨는 유튜브를 통해 인생 2막을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감춰왔던 끼를 보여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도 한다.
"열심히 영상을 만들어 올렸는데 봐주는 사람이 많이 없으면 속상하기도 해요. 아무래도 저는 젊은 나이가 아니니까요.
흘러가는 시간이 자꾸만 아까운 마음이 드니 더 그렇죠. 그런데 어쩌겠어요? 계속 찍어 올려봐야죠(웃음). 몸은 힘들어도 이것저것 해보는 게 재밌어요."
이귀녀 씨는 젊었을 땐 2교대 공장에서 일하며 살림을 했고, 퇴직 후에는 쭉 전업주부로 지냈기에 아직은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간혹 보이는 "멋있어요.", "그 나이에 정말 대단하세요." 등의 칭찬 댓글에 힘을 얻는단다.
여전히 걱정은 되지만 앞으로 힘이 닿는 데까지, 귀녀 씨는 유튜버 <귀한 녀자 귀녀 씨>로서의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패션을 메인 주제로 하며 일상의 따뜻함까지 전해주는 '시니어 유튜버'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귀녀 씨는 또한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안 되는 건 없다", "도전 못할 일은 없다"라고 말해주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자신도 80대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으니 여러분도 한번 도전해 보라고, 늘 응원한다고 전해주고 싶다고 그는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