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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홍 Nov 10. 2024

아니 할머니 그게 아니라


'뚜르르'


'탁'


"어~ 우리 이서홍 PD님~"


요즘 할머니가 나의 전화를 받을 때 자동응답처럼 하는 말씀이다.

그럼 나도 지지 않는다.


"아이고 우리 배우님~ 뭐하셔~?"


그리고서는 둘이 까르르하며 한참을 웃는다. 이것이 나와 할머니의 통화 방식이자 놀이이다.


이날도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가장 시간을 많이 들이는 이야기는 '유튜브'이다.(나는 할머니와 함께 유튜브 <귀한 녀자 귀녀 씨>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에는 뭐 찍을 게 있나? 생각한 거 있냐~?"


"응 할머니, 이번에는 음식을 좀 해보면 어떨까? 아니면 날씨가 좋으니까 밖에 나가도 좋고요."


할머니와 나는 유튜브 촬영 전 통화를 하며 항상 계획을 세우고는 한다.

할머니가 잘할 수 있는 콘텐츠인지,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한다.


아무래도 할머니의 컨디션을 고려해 최대한 짧게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 서로가 힘든 상황이 될 수 있다.


또 우리 할머니이자 배우인 귀녀 씨는 흔히 말하는 '완벽주의자' 성향이어서 대충은 용납하지 않으신다. 사실 나는 큰 틀을 머릿속에 대강 그려놓고 일을 시작하는 스타일인데, 귀녀 씨와 유튜브 작업을 할 때는 대본과 계획서까지 미리 써 놓는 편이다. 내가 원래 해오던 방식은 아니지만 이렇게 할머니와 맞춰가는 과정이 재미있기도 하다.




그렇게 30분 정도 유튜브 이야기를 나누고는 다 못다 한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요즘 컨디션은 어떠신지, 할아버지도 괜찮으신지(할아버지는 37년생. 만 87세.) 등 이것저것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즐겁다.


그러다가 문득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5월에도 같이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시간이 촉박한 탓에 아쉬움이 남았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우리 이번 달에 여행 갈까? 평일에 가면 차도 덜 막힐 것 같고. 그리고 춥기 전에 또 갔다 와야지."


할머니는 크게 웃으며 "그래~ 가면 좋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네 말처럼 이제 나이도 있는데, 죽기 전에 갔다 와야지(웃음)."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할머니에게 뭐라고 말했길래 이런 말씀을 하시지? 너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잠시 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춥기 전에"라고 이야기한 것을, 할머니는 "죽기 전에"로 잘못 알아들으신 것이었다.


"아니 할머니 그게 아니라,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요! 죽기 전에 말고 춥기 전에!"


할머니는 잠깐 멈칫하시더니 이윽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마치 박장대소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 춥기 전에?(웃음) 아이고 배꼽이야."


"할머니~ 나 지금 불효자 될 뻔했어. 죽긴 왜 죽어요! 앞으로 오래 사실 건데."


그렇게 우리 둘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웃으며 서로에게 비타민이 되어주었다.


일상 속 작은 해프닝이지만, 나에겐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

지금도 일주일에 3번 이상은 통화를 하는데, 가끔 할머니는 "바쁜 사람을 붙잡아놓았다"며 내심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시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없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 

나는 건강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매일을 감사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그리고 보고 싶다.

이제 말을 줄이고 할머니 목소리를 들으러 가야겠다.

나의 사랑하는 귀녀 씨와 오순도순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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