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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Sep 27. 2022

시간의 차이

며칠째 시차와 대치 중이다.

아니, 그보다는 시차에 지고 있는 중이란 말이 맞는 듯하다. 대치 중이란 말은 내 의지의 표명일뿐, 실은 시차에 압도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낮과 밤이 완전히 바뀐 시간대에 며칠째 갇혀 있다.

서울에 갔다 올 때마다 겪는 일이라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새로운 느낌이다. 집에 돌아와 해야 하는 시차 적응은 매번 힘들고 오래 걸린다.

어쩌면 시차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나 자신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어릴 땐 학교 개학 준비와 남편의 출근 등으로 서울에 가면 기껏해야 열흘에서 2주 머물다 오는 게 다였다. 이젠 아이들이 다 자라 독립해 살고 있고, 남편의 일도 랩탑과 전화기만 있으면 가능하니 서울 방문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 요즘 '한 달 살기'란 말이 트렌드처럼 들리더니, 나도 서울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온 셈이 되었다.

비행기가 출발하고 나서 몇 번이나 서울로 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천에 내리면...' 하다가 착각인 걸 깨닫고 마음이 헛헛해졌다.

갈 때보다 돌아올 때의 비행시간이 한 시간 정도 짧다. 그 한 시간의 차이로도 비행기 안에서의 운신이 훨씬 수월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어느새 퉁퉁 부어오른 발과 핏발 선 눈,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비행기에서 공항으로 이어진 길을 걸어 나온다. 코로나가 한창인 작년만 해도 공항을 드나들기가 쉽지 않았으나, 지금은 예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우버 택시에 몸을 앉히고 보니 천장이 통유리로 돼 있었다. 나는 목을 의자 등받이 윗부분에 한껏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얼굴과 하늘이 평행이 되며 아침의 싱싱한 하늘이 쏟아질 듯 보였다.

내가 탔던 비행기가 조금 전까지 헤엄쳐 다니던 구름을 어느새 차 안에서 올려다보고 있다. 가을 하늘은 여기도 여전하다.

사계절이 다 있는 곳에 살고 있는 게 새삼 감사했다.



집 문을 열고 들어오니 익숙한 냄새가 반겨준다. 조금은 데면데면한 기분으로 테라스 창부터 활짝 열었다. 하늘처럼 공기도 가을이다.

옷과 세면도구를 꺼내고 나니 금방 가방이 휑해졌다. 여행이나 짐 싸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나는 '짐은 간소하게'를 부르짖는 편이다. 짐이 많으면 가방이 무거워지듯 마음도 무겁다.

열세 시간을 날아왔는데 여긴 아직도 내가 서울을 떠나던 그날 그 시간이다. 이 신기한 현상을 이해하는 어른이 돼 있는 게 아쉽다. 아직 어린아이였다면 '와, 비행기 탄 시간이랑 내린 시간이 똑같아. 그 사이 시간들은 어디로 간 거지? 꿈이었나?' 이러면서 무척 재미있어했을 텐데 말이다.


보금자리의 안락함, 집순이의 행복감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졌다. 깨어보니 아침이어야 할 한밤중이었다.

못다 정리한 것들을 치우고 빨래를 개킨 후 새벽녘에 잠깐 잤나 싶었는데 깨어보니 오후 두 시였다. 몸의 시계는 완벽하게 서울의 시간을 따르고 있었다.

잠이 깰락 말락 할 때쯤엔 머릿속으로 지인들과의 약속 시간과 장소를 생각하고 있다. 만남이 아쉬웠던 사람과는 한 번 더 만나야지 하다가 잠이 완전히 깨어서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릿하다.

창을 열면 머물던 숙소 맞은 편의 낡은 빌라가 보일 것 같다. 문을 나서면 명동이나 남대문, 기차를 탔던 서울역이 나올 것 같다. 친구들과 약속하고 나가면 곧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착각인지 꿈인지 모를 생각들이 잠을 들고 깨는 동안 무수히 지나간다. 나의 향수병(Homesickness)이다.

내가 시차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나의 향수병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향수병을 즐기기 위해 스스로 시차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향수병은 내게 기억이다.

서울에서의 기억들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향수병의 힘을 빌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향으로의 여행, 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찾아오는 꿈결 같은 그리움 속에 나는 다시 와 있다.

이제 그만 깨어날 때가 된 것일까, 이 감미롭고도 슬픈 먹먹함 속에서.

깨어나기 싫은 꿈속에 조금만 더 머물고 싶다.

소중한 일상에 이 그리움 한 조각을 데리고 와 외로운 마음을 달랠 때 쓰고 싶다.

나는 아직 낮과 밤 사이에 있다. 그 시간의 차이 속에 그리움을 가득 품은 채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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