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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Sep 05. 2022

커피와 나

커피를 처음 마셔본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커피를 즐겨 마시던 엄마가 부엌 싱크대 한쪽 구석에 고이 모셔둔 인스턴트 커피였다. 나도 달라고 엄마를 몇 번이나 졸랐지만 커피 마시면 키 안 크니 어른이 될 때까진 마시면 안 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어느 날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엄마가 자는 틈을 타 몰래 커피병을 열었다. 엄마가 마시던 구수한 커피 냄새와는 달리, 병을 열고 맡아본 냄새는 강하다기보다 차라리 독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하던 대로 끓인 물에 커피를 넣고 휘휘 저어 마셔보았다. 처음 맛보는 강렬한 쓴 맛은 혀가 녹을 것 같은 충격이었지만, 커피 냄새는 싫지 않았다.

나는 그날 커피 한 잔을 홀짝홀짝 다 마시고 창이 훤해질 때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비몽사몽 학교에 갔다. 친구들과 커피 이야기를 하다가, 시험공부할 때 엄마가 커피를 한 잔씩 타주는 친구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 거구나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시험 때만 되면 나의 커피 훔쳐마시기 모험이 시작됐다. 가끔 엄마한테 들켜 잔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이미 커피 맛을 알게 된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몰래 마시는 재미는 힘든 시험공부를 견디게 해주는 낙이 됐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몰래 커피를 마셨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카페에서 당당하게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니까 내가 공식적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대학교 1학년 때가 된 셈이다.


내가 어릴 때완 달리, 지금은 온갖 종류의 진귀한 커피를 고루 맛볼 수 있고 거리엔 커피 전문점이 넘쳐난다. 병에 든 인스턴트 커피가 선택의 전부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러나 나의 커피 취향은 딱 하나, 달달한 커피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동안 커피를 권하면 나는 언제나 다방 커피를 달라고 한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원두 말고 믹스 커피를 마시자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단 맛이 든 커피 한 잔을 손에 들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커피 고유의 쓴 맛이나 신 맛보다는 설탕의 단 맛과 우유의 고소한 맛이 나는 커피가 좋다. 마흔이 넘고 나서부터는 성인병에 대한 우려 때문에 조심하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달달한 커피가 좋다.

약간의 위염이 보이니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절망했던 적도 있다.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면 살아갈 동력 하나를 빼앗기게 될 것 같았다. "선생님, 제발 하루 한 잔은 마셔도 된다고 말해 주세요, 네?" 나의 간절한 부탁에 의사 선생님은 마지못해 "그러세요" 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며칠 전 내가 다니던 대학에 갔었다. 마침 가을학기 졸업이 한창이었다. 여기저기 졸업생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졸업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 둘러보아도 학교는 여전하다. 몇 년 전 대규모 공사로 좀 달라지긴 했어도 건물과 나무들 그리고 캠퍼스 곳곳의 길들은 변함이 없다. 내가 몸 담았던 시절부터 그대로인 화단과 계단의 돌들이 신기하고 소중해 한 번씩 만져보기도 했다.

학생회관에 들어가 잠시 쉬는 동안 나는 계속 두리번거렸다. 마치 습관처럼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커피 자판기가 있던 곳에 현금 입출금기가 들어서 있는 걸 발견했다. 건물마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커피 자판기는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부하다 잠깐 로비에 나와 친구들과 함께 뽑아먹던 자판기 커피, 수업시간 직전 정신 무장을 위해 동전과 바꿔 먹던 자판기 커피, 그리고 썸 타던 동아리 친구와 한 잔씩 나누어 마시던 달콤 쌉싸름한 커피 맛을 기억하는 나만 동그마니 거기 있었다.


내가 왜 그토록 달달한 커피를 좋아하게 됐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성인이 되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마실 수 있었던 그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나는 여전히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커피 자판기는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자판기 커피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달콤한 커피 맛은 여전히 내게 행복감을 선사하고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보태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마셔온 달달한 커피들은 추억이자 자유로움이었다.

오늘도 단 맛이 든 커피 한 잔을 들고서 커피를 몰래 끓여 먹던 옛날의 나, 학교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던 나, 그리고 지금의 내가 만나는 작은 기적을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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