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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May 08. 2022

집순이의 여행론

공항에 내려 숙소까지 우버를 탔다.

남편이 트렁크에 짐을 싣는 사이, 기사가 내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순간, 약간의 경계심이 내 안에서 일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뜸 사적인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마스크 때문에 그의 눈만 볼 수 있었지만 인상이 나쁜 것 같지 않아, 한국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몹시 반가워하며 우버 앱에 뜬 남편의 이름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한국인의 이름 표기 방식을 아는 걸 보니 한국인 친구가 있나 보다 생각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우리의 침묵을 깨고 기사는 자신이 한국 드라마 팬이라고 말했다. 제일 좋아하는 배우는 박신양인데 그가 나온 드라마는 다 보았다고 한다. 그러더니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 노래랑 드라마 OST 들을 틀어주었다. 필리핀에서 온 우버 기사의 차를 타고 우리말 가사의 노래를 들으며 타지의 낯선 거리를 달리니 참 신기했다. 처음 미국에 왔던 2000년대 초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우리가 한국 사람인 걸 기사가 왜 그렇게 반겼는지, 어떻게 이름만 보고 한국 사람인 걸 알았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손님에 대한 서비스가 아니라, 그는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와 배우에 대해 한국 사람과 정말 이야기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잡채를 어떻게 만드는지 배웠고 비빔밥, 불고기도 할 줄 안다고 말할 때쯤 아쉽게 숙소에 다 왔다.

차에서 내리는데 그가 "안녕히 가세요"하고 우리나라 말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살다가 종종 낯선 곳에 갈 때가 있다.

집을 떠나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설레게도 긴장되게도 한다. 그 낯섦에서 우리는 얼른 익숙함을 찾고 편안해지려 한다.

전에 보거나 들어서 좀 아는 것들을 낯선 환경에서 접하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 긴장하고 헤매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한층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우리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그 적응의 과정에 어떤 변수들이 작용할까. 어떤 요소들이 보다 쉽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 것일까.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자는 게 편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내 몸을 맡기는 게 불안하다.

어릴 때부터 엄마 품을 떠나 외가나 친척집에 많이 다녀 봐서 낯선 데 가는 것에 익숙할 만도 한데, 나는 여전히 집을 떠나면 불편하다.

할머니나 이모가 마냥 좋아서 따라나서긴 했어도, 막상 잘 시간이 되면 뽀송뽀송 좋은 이부자리에서도 밤새 뒤척였다.


초등학교 때는 소풍날 비가 왔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다.

교실을 벗어나 공기 좋은 곳에 가서 게임도 하고 도시락도 먹고 친구들과 소리 지르며 실컷 놀 수 있는 소풍 날을 누구나 기다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덜컹덜컹 왁자지껄 버스를 타고 흙먼지 날리는 야외에 나가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 것도 싫었고, 눈썰미가 별로 없어 보물을 잘 찾거나 게임에 능하지가 않아서 노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대신, 하루 종일 공부 안 하고 교실에서 싸온 도시락을 까먹으며 친구들과 놀 수 있는 비 오는 소풍날이 더 좋았다.

중고등 학교에 가서도 수련회나 수학여행이 별로 신나지 않았다. 다만, 마음 맞는 친구들과 계획을 잘 짜 놓았을 때는 예외였다. 친구들과 놀 생각에 전날 밤 잠을 설쳐가며 여행을 기다렸다.


대학에 가면서부터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참 재미있었다.

부모님이 내가 여행 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말려서 - 나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못 믿는다고 하셨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그건 부모님의 이기적인 마음을 포장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당신들의 시야에 내가 부재할 때 감당해야 할 걱정이 버거웠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때로 염려와 가슴 졸임도 부모의 몫이다 - 누구나 다 가는 MT도 몇 날 며칠 허락을 구해야 갈 수 있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뜻이 맞기만 하면 나는 여행을 감행하곤 했다. 조용한 모습 안에 감춰졌던 요란한 반항이 그때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상하게 금방 친해지고, 낯설고 불안하기만 했던 타지가 포근하게 느껴진다. 일탈이 주는 자유로움이 마음을 열어주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여행들을 돌아보면, 함께했던 사람과 불편하면 아무리 근사한 곳이라도 별로 좋은 기억이 없다. 반면, 그리 유명한 여행지가 아니어도 같이 갔던 사람들이 나와 잘 맞았을 땐 추억거리가 많다.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사람 말이다.

내게 여행은 편한 사람과 함께하거나, 낯선 사람과 친해지게 만드는 이벤트 같은 것이다.

이번 여행도 우버 기사와의 짧은 만남 덕에 한층 즐겁고, 처음 와 본 이 도시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역시 집이 제일 좋다.

집에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다.

집에 돌아가면 그동안 시어졌을 김치로 찌개를 끓여 밥이랑 같이 먹고 싶다.

그리고 일상의 트랙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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