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Lee Jun 04. 2022

롱디 부모되기

Long Distance Parenting

"엄마, 수고했어."

작은 아이가 나를 껴안으며 서툰 발음으로 말한다. 가슴이 찡하다.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우리를 방문했었다. 직장에 다니는 큰 아이는 일이 바빠 사흘 만에 갔고, 작은 아이는 2주 동안 머물다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엄마 떨어지기 싫어 울며 매달리는 영어 한 마디 할 줄 모르던 세 살짜리를 낯선 프리스쿨 교실에 떼어놓고 집에 와서는 애를 버리고 온 것만 같아 혼자 통곡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 아이가 이제 다 커서 나보고 수고했단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2020년 3월 락 다운 직전, 대학 기숙사에 있던 작은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교 주변에 코로나 환자가 생겨 모두 학교를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니 데리러 와달라는 것이었다. 대학 첫 학년을 한 달가량 남겨두고 학교는 폐쇄됐고, 나와 남편은 서둘러 아이를 집에 데려 왔다. 그리고 6월까지 3개월 동안 미국 대부분의 지역이 락 다운되었다. 당시 트럼프 정부가 방역 대신 마스크 착용 유무를 정치화시키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 착용을 거부했다. 대학 기숙사의 학생들은 마스크 없는 모임과 파티 등을 강행했다. 9월에 학기가 다시 시작되었으나, 아이는 안전을 위해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1년 휴학을 결정했다.

큰 아이가 사는 도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서, 코로나로 사망한 시신을 보관하는 냉동 트럭이 도로 여기저기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2020년의 참혹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며 약간의 고비를 넘은 듯 하자, 큰 아이가 좀 더 나은 환경으로 이사를 했고 작은 아이가 합류해 둘이 함께 살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아예 학교도 그곳으로 편입해 다니고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이른 아이들의 독립이었다.


큰 아이가 집에서 차로 열두 시간 거리의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이 몰래 참 많이 울었었다. 아이가 원하던 학교였고 몇 달간 충분한 준비 시간이 있었음에도 헤어지는 게 너무 힘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 막상 아이를 떼어놓고 나니 온갖 깊은 감정이 턱 밑까지 올라왔다. 키우면서 못해준 것만 생각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와 통화를 할 때도 눈물을 꿀꺽꿀꺽 삼키느라 목이 뻐근했다. 내가 울면 생전 처음 부모 품을 떠나 혼자 생활하는 아이가 힘이 빠질까 봐 두려웠다.

아이는 신나고 씩씩하게 잘 사는데, 나는 혹독한 ‘빈 둥지 시기’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분리불안은 아이가 아니라 내 몫이었던 것이다.


작은 아이 독립은 그동안의 훈련 덕인지 큰 아이 때보다 수월한 편이다. 둘이 같이 있다는 게 얼마간의 위로도 된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으며 함께 산 지 벌써 2년이 다 돼 간다.

처음엔 자주 하던 연락도 아이들이 바빠지면서 점점 그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같은 공간에 살지 않으니 사사건건 걱정이 되었다. 어쩌다 아이들이 밤늦게 귀가할 일이라도 생기면 무사히 집에 왔다는 연락을 받기 전까지 잠도 못 잤다. 큰 아이는 그런 나에게 일정한 거리 두기를 요구했다. 큰 아이와 나 사이에 '간섭'과 '사생활'이라는 말들이 난무하다 언쟁으로까지 흘러갔다. 서운하고 쓸쓸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아이들을 아직도 아기처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속의 아기들이 이제는 다 큰 아이들에게 투사되었던 게 깨달아졌다. 어엿한 직장인과 대학생이 되어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를 자리매김하던 아이들을 나는 여전히 품엣자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동안 큰 아이가 했던 말들이 다 이해가 되었다. 내 말만 옳다고 생각하고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아이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듣는 척만 했지 듣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더 이상 내가 필요 없어졌다는 생각에, 내 존재만 앓고 있었던 것이다.

 한결같던 무언가가 다르게 느껴질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에만 빠져 있을  아니라, 이미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몫의 변화도 수용해야 한다.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아기가 아니다. 그들이 인생 주기에서 다른 국면으로 들어섰으니 나의 엄마 역할도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어릴  그때대로, 성인이 되면  그에 맞는 부모의 역할이 을 것이다. 아이들의 나이에 따라 양상이 달라질 , 부모 노릇은 평생 계속되는, 졸업도 폐업도 불가능한 일이다.  

"친구 같은 부모'라는 말은 '딸 같은 며느리' 만큼이나 현실감이 떨어진다. '친구 같은 부모'라는 말은 아이와 친구처럼 스스럼없고 친해 보이는 부모를 뜻할 뿐, 부모가 친구일 수는 없다. 부모는 부모다. 그래서 아이 앞에 마냥 편할 수만은 없고 늘 일정량의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게 부모다.


그래도 생각은 자유니까 내 마음속에선 언제까지나 내 아기들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절제할 줄 아는 것도 부모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문자나 통화로 생각을 나눌 땐 친구처럼 서로 편한 마음이면 좋겠다.

내가 필요할 땐 언제나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 나이 때의 나를 기억하며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을 언제나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을 살짝쿵 전하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이전 10화 혼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